AI가 제조 공장과 디자이너 연결…'신발판 팹리스' 기업 나왔다

크리스틴컴퍼니의 신발 혁명
AI 신발 플랫폼 '신플' 출시
부품 제조공장 445개 데이터화
제조기간 8개월서 39일로 단축

현재 625개 브랜드 '신플' 활용
해외 브랜드도 플랫폼 탑재 추진
"메이드 인 코리아 위상 높일 것"
부산의 한 신발 부품 제조공장에서 작업자들이 신발을 조립하고 있다. 크리스틴컴퍼니 제공
신발 부속이 제각각인 공장 440여 개가 플랫폼 하나에 연결됐다. 부속이 많아 유난히 어려운 신발 디자인의 진입장벽도 허물어졌다. 인공지능(AI)의 힘이다. 대량생산, 저임금을 위한 해외 거점 공장 설립 등 과거 생산 체계에 머물렀던 부산 신발산업이 전환점을 맞았다. 플랫폼 기업 크리스틴컴퍼니의 등장 때문이다. 서울의 디자이너와 부산 영세 공장의 연결로 신발 제조 기간에 걸리는 시간이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른바 ‘신발판 팹리스’의 등장이다.

○과거 분업 체계 머무른 부산 신발 제조 산업

1967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섬유와 신발 수출 산업화가 반영되면서 부산 경제는 대량생산 체계를 갖춘 신발 산업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신발 수출액은 급격히 성장하며 신발 제조업의 해외 투자를 부추겼다. 부산테크노파크 조사에 따르면 1994~1995년 사이 중국(25개 업체 60개 라인)과 베트남(5개 업체 30개 라인)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신발의 브랜드 전략에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전히 부산은 국내 신발 생산 기지로 꼽힌다. 부산테크노파크가 통계청 자료에 기반해 조사한(2022년 기준) 전국 신발 관련 기업(324개) 가운데 부산 신발 관련 기업(143개) 비중은 44.1%를 차지했다. 특히 신발 부품 제조업으로 시야를 좁히면 전국의 1133개 공장(1인 이상 사업체) 중 56.8% 수준인 643개 공장이 부산에 집중됐다.

신발 완제품을 생산하는 입장에선 분업화된 제조 공정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재단 공정부터 시작해 신발 끈을 결합하고 포장 배송까지 최소한 10개 이상의 공정별 제조 공장을 만나야 한다. 제작하는 신발의 종류부터 소재와 특성 등이 다양하므로 일감을 맡길 공정별 공장이 하나만 정해진 것도 아니다. 결국 신발 하나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3~5개의 에이전시를 통해야 한다. 소비자의 신발 트렌드의 변화는 민감한데 제작 공정은 평균 8개월 이상으로 길다.

○AI가 풀어버린 숙제

크리스틴컴퍼니는 AI 기술을 활용해 신발 플랫폼 ‘신플’을 올해 1월 출시했다. 이 기술로 에이전시가 연결하던 신발 부품 제조공장의 일감이 분산됐다는 평가다.

크리스틴컴퍼니는 전국 1000여 개의 신발 부품 공장 중 445개를 데이터화했다. 생산 제품과 생산 능력, 공장의 브랜드 영업망, 단가와 제품의 질 등 정량적 지표에 더해 대표 인터뷰까지 덧붙였다. 사장의 성향까지 데이터로 녹여 디자이너가 원하는 신발을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디자인 이미지와 필요한 텍스트를 입력하면 AI가 자동으로 분석해 신발 제조에 딱 맞는 공장을 추천한다. 이민봉 크리스틴컴퍼니 대표는 “서울의 젊은 디자이너가 말투가 투박한 경상도 사장님을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며 “통상 신발 제조에 걸리는 기간은 8개월 정도인데, 신플에선 평균 39일이 걸린다”고 말했다.

크리스틴컴퍼니는 공장뿐 아니라 신발의 3D(3차원) 디자인 제작까지 지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AI 기술이 접목됐다. 국내외 명품 홈페이지의 신발 이미지 데이터를 수집했다. 1년6개월에 걸쳐 이미지를 AI가 학습할 수 있도록 라벨링 작업을 했는데, 그 수가 자그마치 14만7000장에 달한다. 국내 상장사 기준 생성형 AI 데이터 활용 기업의 평균 신발 라벨링 데이터 수가 3만 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주 높은 수치다.스케치 후 활용할 수 있는 소재와 색상을 직접 고르고 실험하는 등 신발 디자이너의 작업은 의류 디자인보다 손이 많이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틴컴퍼니의 AI 대량 학습은 신발 디자이너의 잡일을 대폭 줄이고, 신발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신발 디자인의 접근성까지 끌어올린 셈이다.

크리스틴컴퍼니의 목표는 반도체 팹리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해외 유명 브랜드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선호하면서 해외 브랜드를 플랫폼에 들여 국내 부품 제조 공장을 연결하는 게 크리스틴컴퍼니의 목표다. 현재 크리스틴컴퍼니를 이용하는 브랜드는 625개에 달한다.

이 대표는 “신발 디자이너가 원하는 모든 것을 신플의 AI가 답해준다”며 “최근엔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 공장도 데이터에 넣어 저가용 신발은 해외 공장에, 고가용 신발은 한국 공장에 맡기는 시스템을 구축 중”이라고 밝혔다.

부산=민건태 기자 mink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