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지식인의 얼굴을 한 사기꾼들

'진보 지식인' 행세 루이제 린저

진실의 변조·은폐 서슴지 않았던
'판도라의 시궁창' 사후에 드러나

'지식인' 자처 '좌파 86세대'엔
린저의 '어두운 그림자' 여전

이응준 시인·소설가
서재를 정리하다가 먼지투성이<상처입은 용(Der verwundete Drache)>(1977)을 발견했다. 소설가 루이제 린저가 작곡가 윤이상을 인터뷰한 대담집이다. 이런 걸 읽었으니 새삼 나도 ‘386’이구나 싶어서 쓴웃음이 났다. 이념보다 무서운 게 ‘시대’다. 진실보다 힘이 센 게 ‘유행’이다. 이 노릇을 경계해야 ‘진지하게 어리석은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루이제 린저가 남한에서도 유명해진 것은 <생의 한가운데>(1950)가 독문학자 전혜린에 의해 1961년 번역 출판되면서부터다. 린저에게는 민주화운동 유공자 비슷한 이력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 재직 중 나치당 가입을 거부 사직했다는 것, 히틀러 정권에 반항하다가 출판금지를 당하고 게슈타포에 체포 투옥돼 1944년 10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는 것 등이다. ‘불의(不義)에 맞서는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린저는 적군파(赤軍派)의 테러를 옹호하고 1972년 서독 하원 총선에서는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를 지지, 정치적 동반자를 자처했다. 이란의 호메이니에게 ‘제3세계 국가들의 빛나는 본보기’라는 찬사를 바쳤고 1984년에는 녹색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1994년에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로 달라이 라마를 찾아가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관해 대담했다. 여하튼 린저는 2002년 3월 17일 90세로 죽기까지 진보적 지식인 행세로 점철했다.그런데, 2011년 미스터리 영화의 반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루이제 린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린저와 절친한 신부(神父) 무리요가 린저의 첫째 아들 크리스토프와 함께 출판한 린저의 전기 <모순 속의 삶>이 그것이었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은 린저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생애를 추적했는데, 웬걸, ‘판도라의 시궁창’이 열려버린 것이다.

린저의 베스트 프렌드와 아들은 사적인 우정과 이기적인 천륜보다 더 크고 소중한 진실 앞에 순종하여 “루이제 린저가 우리 모두를 속였다”고 밝혔다. 린저는 열성적 나치 교사로서 나치 찬양시와 나치 찬동소설을 썼다. 유대인 교장을 비난함으로써 승진과 나치당의 신임을 얻었다. 나치 여성동맹과 나치 교육자연맹 소속이었고, 나치 청년여성 조직인 독일소녀동맹의 한 교육소 책임자였으며 괴벨스가 제작하는 선전영화의 대본작가로서 두둑한 보수를 챙겼다. 그녀는 나치에게 출판금지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투옥은 보잘것없는 고자질에 의해 빚어진 구치소 구금 정도의 사건이었다. 물론 사형을 언도받은 적이 있을 리 없고, 공식서류에 나치에 대한 ‘국가반역죄(Hochverrat)’를 기입해 과거를 미화한 것은 린저 자신이었다. 그런 그녀가 <상처입은 용>에서 윤이상에게 “감옥에서 나치의 재판을 앞두고 사형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나는 젊은 반란자였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무리요 신부는 린저가 전후(戰後)에는 민주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변호하지만, 차마 더는 모질지 못해서 한 따뜻한 헛소리일 뿐이다. 린저는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과 얼싸안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가난과 형무소가 없는 지상낙원이라고 북한을 선전한 대표적 서구 지식인이었다. 그녀가 달라이 라마와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떠들어대던 그해에 북한에서는 300만 명이 굶어죽어갔고, 김정일은 그 300만 명을 3년간 충분히 먹이고도 남을 옥수수 600만t 이상을 살 수 있는 8억9000만달러로 김일성의 능을 만들고 김일성의 미라를 안치했다.

폴 존슨의 <벌거벗은 지식인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방해가 되는, 객관적인 사실로서 나타나는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진실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다. 지식인들은 자신들에게 못마땅하고 대단치 않게 여겨지는 진실을 무시하고, 변조하고, 역전시키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은폐하기까지 한다.” 린저가 북한에 대해 했던 ‘수준의’ 개소리들을 오늘 우리가 다른 주제에 대해 일삼는다면 인간 취급을 못 받을진대, 남한의 대표지식인이라는 자가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평해도 지식인으로서 아무 지장이 없는 ‘진지하게 어리석은 노예들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루이제 린저는 남한 지식인의 메타포인가, 리얼리티인가. 왜 아직도 이런 질문이 괴롭고 고독하게 느껴져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