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영국도 빗장 푸는 조력사

인위적으로 생명을 중단하는 행위를 최초로 인정한 나라는 스위스다. 1942년부터다.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환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도록 하는 조력사 방식이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조력사를 허용한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호주의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104세 때인 2018년 조력자살을 택한 곳도 스위스다. 구달 박사는 진정제 등을 혼합한 정맥주사 밸브를 스스로 열었다.

의료인이 직접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안락사의 첫 합법화는 2002년 네덜란드에서다. 네덜란드는 안락사와 조력사를 모두 허용하고 있다. 한 해 8000명 이상이 이런 존엄사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올 2월에는 대학 캠퍼스에서 만나 70년을 해로한 93세 동갑내기 전 총리 부부가 동반 안락사를 택해 화제가 됐다.보수적인 영국에서 조력사 허용법이 하원을 통과해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6개월 미만 시한부 판정을 받은 말기 성인 암환자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조력사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BBC 등이 생중계한 하원 본회의는 표결에 앞서 5시간 가까이 토론이 이어졌고, 발언권을 요청한 의원만 160명이 넘었다고 한다.

유럽은 존엄사 인정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프랑스는 국보급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가 2022년 스위스에서 조력사한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관련법 제정을 주도하고 있다. 인구 70%가 가톨릭인 스페인은 ‘씨 인사이드’라는 영화로도 다뤄진 30년 조력사 법정 투쟁의 주인공 ‘라몬 삼페드로 사건’ 이후 2021년부터 합법화했다.

소극적 안락사인 연명치료 중단만을 허용하는 한국에서도 조력사에 관심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서울대병원 조사에 따르면 조력사 찬성 여론은 2017년 50%에서 2022년 76.3%로 뛰었다. 영국에서 2015년 부결된 조력사법이 이번에 통과된 것과 비슷한 흐름이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개·고양이를 안락사시키지 않으면 비난하면서 사람에 대한 안락사는 왜 살인죄로 모는가”라고 물었다. 도킨스의 견해가 대세가 되는 분위기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