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흐르던 자리에 예술이 흐른다, 조치원문화정원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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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영식의 찾아가는 예술 공간세종시 조치원의 조치원문화정원은 본래 1935년 일제강점기에 조치원 지역의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수장이었다. 수천 톤의 물을 정화하며 78년 동안 지역 주민들의 삶에 필수적인 생명의 물을 제공하던 공간이었다.시간이 흘러 2013년, 정수장은 운영을 멈췄고 한동안 방치되며 잊힌 공간이었으나,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후 2019년, ‘조치원문화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며 과거의 흔적을 품은 복합문화공원으로 재탄생했다.한때 맑은 물이 흐르던 자리가 이제는 예술과 이야기가 넘치는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곳에서 물에서 문화로 변모한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느끼며 그 첫 모금을 음미하게 된다.
세종시 조치원문화정원
정수장에서 복합문화공원으로 재탄생해
다양한 세대와 일상이 공존하는
생활형 예술공간으로 자리 잡아
문화정원의 중심에 자리한 ‘기억공간 터’는 과거 기계실을 새롭게 단장한 공간이다. 기계실에는 근대 건축물의 흔적과 현대적 감각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건물 안쪽에는 세월을 견뎌온, 오래된 창문과 새로 설치된 현대적인 창문이 나란히 있다. 관람객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이 창문들을 통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게 된다.기계실 입구에 걸린 현판에 적힌 “감천류여람(甘泉流如藍)”이라는 문구가 흥미롭다. “감미로운 샘물이 흐르며 푸른 하늘을 품다”는 뜻으로, 한때 이곳이 맑은 물을 공급하며 인공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던 공간임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글귀다. 문화정원 관람은 기계실에서부터 시작하시길 권한다.기계실 옆에 자리한 ‘전시공간 샘’은 과거 지하 수조를 새로운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으로 미술 전시와 음악 공연이 열리는 복합 예술공간이다. 전시공간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지하 콘크리트 벽에는 한때 물에 잠겨 있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때와 시멘트가 벗겨져 생긴 얼룩덜룩한 흔적들은 단순한 자국을 넘어, 시간이 만들어낸 작품처럼 보인다. 이러한 독특한 질감은 전시공간 자체를 하나의 설치 예술 작품으로 느끼게 한다.문화정원에서 진행되는 아동 미술학습 프로그램 중 하나인 'Backdrop Painting’은 전시공간 벽의 질감을 창작에 활용하고 있다. 마치 아이들의 손끝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오래된 벽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도 묘한 감동을 선사한다.
12월에는 ‘세종화랑협회 창립기념 아트페어’가 예정돼 있다.전시장 맞은편에 있는 정수장의 여과기와 침전기는 더 이상 본래의 기능을 하지 않지만, 문화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된 이 구조물들은 이곳이 과거 정수장이었다는 역할을 증명하는 동시에, 시간이 흐르며 새롭게 얻게 된 새로운 재미를 관람객들에게 전달한다.그런데 여과기 옆에 걸린 독립영화 <빚가리>의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빚가리’는 충청도 방언으로 '빚을 갚다'는 뜻인데, 이 영화가 조치원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에서 문화정원과 찰떡같이 어울린다. 영화 빚가리 속 주인공 ‘대복’은 동네 슈퍼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공과금에 쫓기고, 위자료도 밀리고, 황토색 개량한복 입은 아들마저 도통 마음 같지 않다. 물이 흐르던 정화장이 문화로 재생되기까지 고난과 극복의 과정을 거친 것처럼, 대복도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물탱크가 이제는 '문화로 빚을 갚는' 공간으로 변신했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난다. 이곳에서 마주한 '조치원 올로케이션' 영화는 소소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조치원문화정원을 거닐다 보면 눈길을 끄는 공간이 있다. 바로 청년 작가공방이다. 이곳은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작업실을 넘어 지역 예술 생태계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현재 9명의 예술가가 이곳에 입주해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공방은 예술가들에게 안정적인 창작 공간을 제공하며 지역 예술의 뿌리를 내리고 확장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특히,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관람객이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작업실의 문턱을 낮춘 덕분에 예술은 관람객에게 한층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조치원문화정원은 예술의 공간인 동시에 지역 경제와 밀착된 생활형 공간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워크숍과 체험 프로그램은 단순히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상권에도 활기를 불어넣는다.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정원을 둘러본 뒤 자연스럽게 지역 맛집에서 식사를 하거나 카페를 방문하며 조치원의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문화정원 곳곳에는 지역 식당과 카페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비치되어 있다. “배고프면 여기서 한 그릇!”이라는 재치 있는 문구와 함께 지역 추천 맛집 목록을 안내하며 방문객들이 지역 상권을 이용하도록 독려한다. 마음의 양식 예술과 몸의 양식 밥이 조화롭게 엮인 이 공간은 지역에는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생활형 예술공간이라는 점에서, 화려한 고급예술공간과는 다른 자기만의 멋이 있다.
조치원문화정원은 단순한 문화공간을 넘어 마을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앞마당에서 간식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이곳 풍경에 따뜻함을 더한다. 하지만, 이 어르신들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다. 자칭 ‘인간 CCTV’로 불리는 이들은 문화정원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고 있다. 누가 왔다 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심지어 잃어버린 물건까지 그들의 눈을 피해 갈 수 없다. 덕분에 어르신들은 문화정원의 보안팀이자 분위기를 돋우는 조력자로 자리 잡았다.이처럼 자연스러운 참여와 관심 덕분에 문화정원은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으로 기능한다. 도시재생은 그저 건물을 새로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역 주민들이 그 공간에 스며들고, 이를 즐기며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성공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치원문화정원은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이자 예술 행정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예술과 일상의 만남이 거창하지 않다. 정원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나무 그늘에서 한담을 나누는 어르신들, 산책 중 작품을 감상하며 대화를 나누는 이웃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마치 잘 가꿔진 정원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듯, 문화정원도 세대와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오늘 전시 참 재밌더라. 옆집 아저씨도 봤대!” 같은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가는 곳이야말로 이상적인 지역 문화공간의 모습이다.
예술이란 거창한 갤러리의 전시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에서 문화로, 공간의 재탄생
한때 철저히 통제된 정수장이었던 이곳은 이제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변했다. 과거, 이 정수장이 대지의 심장처럼 맑은 물을 내보냈다면, 이제 문화정원은 그 자리를 대신해 문화를 흘려보내며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물이 사람들의 몸을 깨끗하게 했던 것처럼, 이제 이곳의 문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맑고 풍요롭게 만든다. 물이 육신의 갈증을 채운다면, 문화는 영혼의 갈증을 해소한다. 비록 그 본질은 다르지만, 둘 다 삶을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닮았다.이 정원에서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닌 예술과 창작의 기운이다. 조치원을 방문한다면, 그 흐름을 따라 정원을 거닐어 보길 권한다.
최영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