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은 10대와 잠을 자는데, 그 영화를 걸작이라 해야 하나?
입력
수정
[arte]최효안의 압도적 한 문장작품은 뛰어나지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거장(巨匠)들은 언제나 예술을 향유하는 이들에겐 아주 몹쓸 딜레마입니다. 동시대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우디 앨런은 이 딜레마를 논할 때 첫손에 꼽히는 문제적 예술가죠.
클레어 데더러, , 을유문화사, 2024
우디 엘런, 로만 폴란스키 등
예술가이자 범죄자인 인물들의
‘예술 작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여성 저널리스트의 실존적인 고민을 위트있게 전개
삶과 예술 사이의 혼란스러운 경계를
치밀하게 파고든 걸작이란 평가
그는 여자 친구(미아 패로우)의 양녀(순이 프레빈)와 밀애를 즐기다 발각되자 양녀와 결혼했고, 자신이 양육한 여성 입양아(딜런 패로우)를 7살 때 성추행했다고 아들(로넌 패로우)이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딸과의 결혼에다 소아성애자라는 피해자들과 증인들의 증언이 잇따라 나오면서 우디 앨런을 아끼던 이들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죠.입양아 성추행 부분은 명쾌하게 결론이 나진 않았지만, 우디 앨런이 자신을 아버지라 불렀고 본인 역시 그녀의 아버지로 오랜 기간 부친의 역할을 했던 딸과 결혼했다는 팩트는 변치 않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터부시되는 행동을 한 겁니다.우디 앨런의 사생활도 혐오스럽지만,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차원이 다른 극악한 괴물입니다. 2024년 현재 91세인 그는 무려 12명(그 가운데 11명은 미성년자)의 여성에게 술과 약물을 먹이고 성폭행했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인정한 그는 미국 사법부와 형량 거래를 통해 풀려날 것으로 오판했으나, 판사가 징역 50년을 선고하려 하자 1978년 미국에서 유럽으로 도망갑니다. 괴물인데, 비겁하기까지 하죠.
그리고 무려 46년째 유럽에서 영화를 만들며 금세기 최고의 영화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영화상인 세자르상은 2020년 로만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을 수여)“우디 앨런, 로만 폴란스키 같은 괴물들의 작품을 과연 그것을 만든 사람과 완전히 분리해서 볼 수 있을 것인가?”
정말이지 결론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딜레마로 오랜 기간 고민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매우 자전적인 에세이입니다. 그래서 책은 끝까지 저자의 내면이 양극단을 오가며 무수히 많은 감정이 엇갈리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며 쉽사리 쉬운 결론을 내지 않습니다.책의 프롤로그(아동 성폭행범 로만 폴란스키)에서 제가 꼽은 첫 번째 압도적 한 문장이 나옵니다.
현대 인물들 중에서 명징한 괴물성과 명징한 천재성이라는괴물이자 천재가 내놓은 뛰어난 예술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두 가지 힘을 평등하게 만들어 조화를 이룬 인물은 한 명도 없다.
폴란스키는 세기의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 중 하나인 ‘차이나타운’을 만들었다.폴란스키는 열세 살 서맨사 게일리에게 약물을 먹여 성폭행을 했다.
이렇게 화해할 수 없는 두 사실이 존재한다.
이 모순 사이에서 어떻게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괴물들, 21쪽)
에세이스트이지 영화평론가인 저자는 괴물들의 작품을 보고 에세이나 리뷰를 써야 하는 것이 업(業)이기도 합니다. 괴물들의 작품을 어떻게 바라볼 것 인가는 그녀에게 실존적 고민이기도 하죠.
저자의 고민은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예술과 책을 주제로 칼럼을 쓰는 칼럼니스트이고, 오랜 기간 저널리스트로서 일하면서 예술 기사를 쓸 때 작품은 훌륭한데 인간은 괴물인 아티스트의 예술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고민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문장은 사실 괴물같은 예술가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정말 인격적 윤리적으로 몹쓸 구석이 많음에도,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인간들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우리는 싫어해야 마땅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한다.
우리는 그 사랑을 스위치 끄듯이 꺼 버리지 못한다.
(괴물들, 24쪽)
마음이 스위치 꺼지듯이 꺼진다면 좋으련만 절대 그렇지 않기에, 바로 그 지점이 인생사 모든 희비극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나는 인간의 조건이 자신 안의 사악함과 나약함을 은밀하게 의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매혹되곤 할까?
우리 안에, 내 안의 무엇인가가 그 끔찍함에 공명하면서 내 안에 끔찍함이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문제의 괴물을 요란하게 비난하는 드라마에 짜릿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괴물들, 60쪽)
우디 앨런의 걸작들을 감상하다 보면, 그의 행실은 용납하기 어려워도 슬그머니 마음 한편에는 예술가는 미워해도 작품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죠.괴물 같은 예술가들에게서 책은 시작됐지만, 결국 저자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괴물성과 예술성, 예술의 존재 의미, 예술이 삶에 미치는 영향 등 방대한 주제로 확장해 나갑니다. 마이클 잭슨,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인류사의 남성 괴물 예술가는 물론 反유대주의 성향을 보였던 버지니아 을프 등 여성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치열하게 저자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데, 읽는 이에 따라서는 깨닫는 지점이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는 책입니다.
하나의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두 전기가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전기가 예술감상을 방해할 수도 있고,
수용자의 전기가 예술감상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다.
이는 모든 경우마다 일어난다.
(괴물들, 109쪽)
저자는 챕터마다 뻔한 결론 대신 늘 허를 찌르는 자신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과 마음을 풀어냅니다. 너무 심각하지 않게, 위트가 곳곳에 숨 쉬는 글의 가장 큰 장점은 독자들에게 정해진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정답은 없다.
당신이 정답을 찾아야 할 책임도 없다.
책임감이란 케케묵은 생각이며 비극적으로 제한된 소비자의 역할을 강화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권위자도 없고, 권위자가 있어서도 안 된다.
당신이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이 당신을 나쁜 사람 혹은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괴물들, 296~297쪽)
‘괴물 같은 인간들이 창작한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넓게 보면
‘저마다의 인생을 바라보는 각자의 태도’로 치환해도 썩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고, 우리는 정답을 찾아야 할 책임도 없죠.그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가장 원하는 바를
결국, 자신이 찾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최효안 북 칼럼니스트·디아젠다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