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지도자의 '분노'와 '판단 착오'

머리 밟고 다니는 '미망의 여신'
피할 수 없는 어리석음 상징

분노와 충동으로 가득 찬
비상계엄 담화, 수용 어려워

국정은 이성과 냉정함의 영역
감정에 휘둘린 비극 반복 안 돼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그리스 신화 속 ‘아테’는 사람의 눈을 가리는 미망(迷妄)의 여신이다. 흔히 대지가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다니면서 해를 끼치는 저주받은 존재로 그려진다. 영웅이나 군주라고 하더라도 그의 거센 발길질을 피할 수 없다. 거침없이 사람을 쓰러뜨리고 다니는 아테 여신은 맹목성에서 오는 판단 착오를 상징한다. 어리석은 결정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메시지는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테 여신이 방문했다’고 표현했던, 미망에 빠지는 순간은 어떻게 찾아오는 것일까.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게 된 근원에는 ‘욕심’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속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킬레스가 얻은 ‘전리품’에 눈이 멀어 미망에 빠졌고, 최고의 영웅 아킬레스는 ‘정당한 자기 몫’을 아가멤논에게 뺏긴 분노에 사로잡혀 합리적 판단을 내던져버린다. “모욕을 받아 가며 그대를 위하여 부와 재물을 쌓아줄 생각은 없다”고 아킬레스가 부르짖는 장면은 분노 탓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미망에 빠진 순간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3일 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호소드린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 곳곳에서도 대통령의 ‘분노’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야당이 정부 출범 이후 22건의 정부 관료 탄핵 소추를 발의했고, 22대 국회에서만 10명째 탄핵을 추진 중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 공포에 사용된 표현은 ‘범죄자 집단의 소굴’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의 준동’처럼 매우 감정적이다. ‘괴물’이나 ‘척결’ ‘처단’ 같은 국가의 공적 행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휘도 무더기로 사용했다.

그간 야당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국민 기본권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약하는 명분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다. 야당이 “헌정질서를 짓밟고, 내란을 획책하는 명백한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합리적 근거나 논리적인 설명은 생략됐다. 대통령이 내뱉은 격한 말들은 국가 헌정 체제를 뒤흔들 결정이 합리적인 이성보다 감정에 휘둘려 내려졌다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다. 극단적인 결정이 나온 이유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정치학자 칼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며 전쟁이나 계엄 같은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는 인물에게 남다른 통찰력과 진중함을 주문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따져보면 최고지도자의 결정이 브레이크 없이 즉흥적·감정적으로 이뤄지게 된 데는 뿌리가 깊다. 그동안 한국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왕정이 아님에도 역대 대통령의 ‘심기’ 맞추기가 주요 정책 결정의 근거가 돼 왔다. 객관적 근거에 기인한 냉철한 이성보다 상관의 주관적 판단에 맞추는 것을 우선한 것이다. 그 결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것으로 그려졌고,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엔 통수권자의 ‘격노’ ‘격앙’ ‘대로’ 뉴스가 수도 없이 쏟아졌다. 윤 대통령도 주변의 말은 듣지 않은 채 혼자서 얘기를 쏟아냈으며 듣기 싫은 말에는 역정부터 냈다는 얘기가 취임 초부터 자자했다. 이번에 계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계엄을 반대하는 대다수 국무위원의 의견은 묵살됐다.

국정은 얼음처럼 차가운 판단과 신중한 분석에 바탕을 둬야 하는 분야다. 그런 국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결정이 통제되지 않은 분노와 같은 감정에 휘둘려 이뤄진 모습은 많은 국민을 착잡하고 실망스럽게 한다. “분노는 숙고를 가로막으며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소리만 나면 짖어대는 개처럼 행동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일갈이 무색하게 누구보다 냉철해야 할 최고지도자가 격정에 휘말려 너무나 충동적인 행동을 한 것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망의 여신 아테가 단단한 땅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밟고 다닌다는 메타포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사람이 굳건한 토대 없이 ‘자신만의 왕국’에 갇혀 자신의 감정대로만 살다가는 ‘판단 착오’의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행한 대가는 막심하다. 그 결과 가장 ‘비정상적 정치 행위’인 대통령 탄핵 표결을 또다시 맞이했다. 정말 비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