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삼청동 화랑가 끝에서…'그림의 본질' 묻는 5명의 작가들

피비갤러리 '드로잉: 회화의 시작'
샌정 김정욱 임순남 김세은 윤이도
그림의 기본으로 돌아간 드로잉 전시
연중 현대미술의 향연이 펼쳐지는 서울 삼청동. 볼거리로 떠들썩한 갤러리 골목 끝에 이르면 북악산 아랫목의 자연이 마중 나온다. 화려함이 끝난 뒤 만나는 소박한 아름다움. 화랑가 가장 높은 언덕에 들어선 피비갤러리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여기 있다.

지금 이곳에선 '회화의 본질'을 묻는 작가 다섯명의 단체전이 열리고 있다. 샌정과 김정욱, 임순남, 김세은, 윤이도 작가가 참여한 '드로잉: 회화의 시작'이다.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미술의 개념이 분별없이 확장하는 가운데, 그림의 기본인 '드로잉'에 주목하는 이들이다.
김정욱, '무제'(2023) /피비갤러리 제공
실제 작품에 앞서 대강 그리는 습작으로서의 드로잉을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연필과 파스텔, 먹과 붓 등 여러 매체를 통해 펼쳐낸 이들의 작품 51점은 각각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결성을 갖췄다. 다루는 주제도 자연과 인간 내면, 도시 사회 등 다양하다.

독일과 한국에 오가며 활동하는 샌정 작가의 드로잉이 전시의 시작을 알린다. 연필과 오일파스텔로 그린 13점의 '무제'는 색과 형태를 극도로 단순하게 묘사했다.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린 어린아이의 그림을 연상케도 한다. 자세히 보면 산과 들, 건물 등의 풍경이 비춰 보인다.
윤이도, '타오르던 밤'(2021) /피비갤러리 제공
윤이도 작가는 달동네와 공터, 숲 등 여러 이유로 사라진 서울의 과거 풍경을 묘사한다. 그가 도시를 관찰하며 보고 들은 이야기가 흑백의 화면에 펼쳐진다. 나무 이쑤시개에 먹물을 묻히고, 이를 한국 전통 종이인 장지에 하나하나 새기는 지난한 과정 끝에 작품이 완성된다.작업의 출발점은 작가 외할머니의 오래된 집이었다.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작가는 고인의 빈자리로 인한 상실감을 채우고자 옛 기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작업은 개인적인 추억을 넘어 밤하늘 아래 살아가는 모든 생명으로 확장했다. '타오르던 밤'(2021)은 허름한 판자촌에서 불을 쬐는 이들을 찬란한 별빛이 위로하는 모양새다.
김세은, '움직일 덩어리'(2024) /피비갤러리 제공
윤 작가가 과거의 서울을 그렸다면, 김세은 작가는 현재 도시의 모습을 묘사한다. 신도시에서 자란 김 작가의 유년기 경험이 반영됐다. 매직펜과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신작 15점은 건축 설계도면 일부를 옮겨온 듯한 모습이다. 주거 지역과 토목 시설, 조경 공간 등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도시 구조가 담겨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물화를 그린 김정욱·임순남 작가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한 가지 포인트다. 김정욱 작가의 인물화는 여러 개의 눈과 넓은 미간이 특징이다. 비현실적으로 반짝이는 여러 쌍의 눈을 통해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반면 임순남 작가는 인터넷에 떠도는 '셀카' 사진을 화폭에 옮기는 등 일상적인 이미지를 재현했다.전시는 12월 28일까지.
임순남, '젊은 여인'(2024) /피비갤러리 제공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