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진의 의료와 사회] 국민 정신건강을 걱정하는 이유

정치 혼란 탓에 '집단 스트레스' 증상 늘어
'회피' '부정' 등 방어기재 작동 후유증도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지난 3일 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이어진 정치적 혼란은 국민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안겨줬다. 안 그래도 끝이 보이지 않던 여야 대립에 더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는 중대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같은 극단적 상황은 국민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최근 불면증, 긴장성 두통, 무기력증, 소화불량, 만성 피로, 두드러기, 성욕 저하 등의 증상을 겪고 있다면 이는 정치적 혼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영적 건강까지 고려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빈곤 탈출을 위해 육체적 건강에 치중해 온 우리 사회는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이룬 현재 정신 건강의 가치를 더욱 중시해야 한다. 국제 연구들은 만성 스트레스가 불안, 우울증, 수면 장애 등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를 초래하며 이에 따라 전반적인 삶의 질이 저하된다고 경고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정치는 국민 전체의 건강 성과를 퇴보시키고 있는 실정이다.더욱 우려되는 것은 건강 성과와 더불어 민주주의마저 후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국회 해산권이 폐지돼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완성됐으나, 문화적 정착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의 성리학 문화, 산업화 시기의 국가 주도 관료주의, 독재 저항기의 투쟁 문화가 혼재하는 가운데 Z세대의 미국식 계약주의가 기성세대 문화와 충돌하며 민주주의의 성숙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시기에 민주주의의 성숙을 이끌어야 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권력욕에 사로잡혀 다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국가적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줄이고자 다양한 방어 기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심리학적으로 회피, 부정, 투사와 같은 방어 기제가 대표적이며, 특히 많은 국민이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회피적 방어 기제를 선택하고 있다.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고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해 정치와 같은 스트레스 유발 요인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회피적 방어 기제의 지속은 민주주의 발전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국민이 정치에서 멀어질수록 정치 참여와 관심이 감소하고,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시민 참여를 약화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참여와 신뢰를 토대로 발전하는데, 정치적 회피는 민주주의의 성장을 저해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의 권한 남용과 다수당의 횡포에 실망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정치 자체를 회피하고 있다. 의사로서 나는 스트레스의 원인을 피하라고 조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국민의 생존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는 민주주의를 내세워 급여를 받는 정치인들이 초래한 비극적 결과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이 무의미한 정치적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