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하면 포도만 생각했지··· 이두용이 기록한 것은 한국사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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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효정의 세기의 영화감독▶▶▶ [이전 칼럼] 칸의 레드카펫 밟은 첫 한국인은 '뽕' '돌아이' 이두용 감독[1부]
세기의 거장, 이두용 [2부]
이전 한국영화들과 달리
서울을 메인으로 카메라에 담은
영화 시리즈(1985, 1986)
이 영화가 '혁신'이라 불리는 것은
한국 최초로 시도 된
'카 체이싱 신'과 '오토바이 신'
'뽕', '돌아이',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등
이두용의 작품은 한국사의 얼굴이자
영화 연출의 교본이었다
<용호대련>의 성공 이후 그는 <분노의 왼발>(1974), <돌아온 외다리> I, II 등 70년대를 제패했던 액션 활극 영화들을 줄줄이 만들어 내며 장르의 대가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그가 <최후의 증인>으로 작가주의적 감독의 반열에 설 수 있었음에도,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에 집중을 할 수 있었음에도 <돌아이> 시리즈(1985, 1986) 로 다시금 귀환한 것은 그의 연출 경력의 초안을 다졌던 액션이 그의 작가적 정체성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돌아이>는 밤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 그룹, ‘드릴러’의 매니저 ‘석’(전영록) 과 그룹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액션영화다. 석은 그룹의 멤버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보호하지만 세속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쎈 언니”들 다섯명을 돌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화려한 외모와 옷차림으로 어디 가나 눈에 띄는 멤버들 주변에는 늘 음탕한 남자들과 사기꾼이 즐비하다. 석의 노력에도 흑심을 품은 남자들은 끊임 없이 멤버들에게 접근하고, 속도 모르는 멤버들은 석의 과보호가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멤버들은 석을 쫓아내고 그의 보호가 부재한 동안 멤버들 중 하나가 사기꾼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분노한 석은 범인들을 잡아 일망타진하고 그룹으로 돌아온다.
<돌아이>는 특별한 것 없는 통속 액션극으로 보이지만 당시 한국의 액션 영화에는 전무했던 여러가지 ‘혁신’을 이루어 낸 작품이다. 첫 번째, 영화의 후반에 펼쳐지는 '카 체이싱 신'과 '오토바이 신'은 한국 최초로 시도된 것이다. 영상자료원에서 이루어졌던 <돌아이>의 회고전에서 이두용 감독은 카 체이싱 장면과 전영록 배우가 직접 참여한 오토바이 장면이 <돌아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공을 들였던 부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돌아이>의 혁신은 서울 거리의 재현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클럽과 업소들은 세트장이 아닌 실제 존재했던 랜드마크들로 영화의 상당 부분이 도시의 중심가인 신촌과 명동에서 촬영되었다. 이전의 한국영화 속 서울이 주로 이야기의 후경으로 등장했다면 <돌아이>의 서울은 영화의 메인 스펙터클이다. 마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마이크 피기스, 1996)의 라스베가스가 그러하듯, 영화는 클럽의 간판과 가게들, 그리고 도시를 채우는 음악과 사람들로 서울의 밤거리를 기록한다. <돌아이>의 시그니처 장면, 즉 다섯명의 멤버들이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을 입고 명동의 메인 거리를 횡보하는 장면은 젊은 여성 캐릭터들의 활기를 전시함과 동시에 이들과 공존하는 도시의 에너지와 서울의 모던함을 시각화한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돌아이>는 액션과 스펙터클 등 장르가 요구하는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춘 수려한 액션 영화이자, 이두용 감독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세련된 이미지들이 혼재한 도시 활극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이>의 엄청난 대중적 성공 이후 이두용 감독은 다양한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입지로 부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비슷한 시기에 본인의 제작사를 설립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도향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뽕>(1986), <돌아이 2>, 신상옥 감독의 <내시>(1968)를 리메이크 한 <내시>(1986) 를 비롯하여 <청송으로 가는 길>(1990) 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내며 커리어를 굳건히 이어 나갔다.<돌아이> 시리즈를 제외하고 이두용 감독의 후반 커리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말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통해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경향이라면 사극이다. 다만 80년대에 그가 만든 사극은 이전의 60년대와는 전혀 다른, 이른바 ‘토착 에로’라고 불리었던 하이브리드적 정체성을 가진 성인 사극영화들이다. 이는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으로 한국영화의 성적 표현 수위가 대폭 높아지면서 양산된 새로운 장르로 이두용, 정진우, 이장호 감독 등 80년대를 대표하는 대중 감독들의 필모그래피의 한 켠을 차지하는 작품들이기도 했다.이두용 감독의 <뽕> 역시 이러한 한국영화의 에로티시즘적 경향을 머금고 탄생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주지할 것은 <뽕>에서 재현된 대담한 에로티시즘은, 이두용이 전작 <돌아이>에서 서울의 전경을 재현하는 방법에서 그러했듯 모던하고 전복적인 방식의 이미지화였다. <뽕>을 언급할 때 늘 등장하는 ‘포도 신’은 그간 한국영화, 특히 선대의 호스테스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천편일률적이고도 원시적인 정사 신이 아닌, 인물들을 둘러싼 아이콘과 메타포를 시각적으로 이용한, 이를테면 잘만 킹의 영화들을 연상시키게 하는 새로운 컨셉의 에로티시즘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마지막 연출은 2013년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 중 한 에피소드 <처용무>다. 나는 그가 연출을 그만두고 몇 년이 흐른 2018년 을지로의 한 노포에서 이두용 감독을 만났다. 그는 당시에도 구상중인 시나리오가 있었고, 늘 영화를 그리워했다. 그는 결국 (나의 기억으로는 꽤 괜찮았던) 마지막 시나리오를 영화화하지 못한 채 올해 1월에 돌아가셨다. 무려 44년의 커리어를 뒤로하고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분명 다른 세상에서도 영화를 만들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연출한 <최후의 증인>, <돌아이>, <뽕>,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비단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와 공간, 제도와 인간을 기록한 한국사의 얼굴이자, 영화 연출의 교본이었다. 그는 지금도 도시의 어딘가를, 누군가의 얼굴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