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비에 무상교육 '알박기 증액'…재해 대응 비상금 3800억뿐

野, 사상 초유의 '4.1兆 감액 예산안' 강행 처리

'셧다운' 불확실성만 겨우 해소
與, 막판 3.4兆 증액안 제출했지만
野 "지역화폐 1兆 늘리자" 고수
여야 결국 예산안 합의 불발

감액사업 기금활용 원천 차단
재해대책 예산, 무상교육에 할당
통상·기후변화 신속대응 힘들어져
檢 특경비·警 특활비 전액 삭감
마약·피싱·기술유출 수사에 타격
한덕수 국무총리(오른쪽)와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이 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된 직후 대화하고 있다. 이날 국회는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4조1000억원을 감액한 야당의 수정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이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4조1000억원을 감액한 673조3000억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전격 처리하면서 사상 초유의 준(準)예산 편성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막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이 제시한 막판 협상을 사실상 외면하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합의 없는 통과’라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재해·재난에 투입해야 할 예비비를 고교 무상교육 등에 우선 지원하도록 강제하는 ‘꼼수 편성’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꼼수 편성한 고교 무상교육

국회는 이날 본회의를 열어 673조3000억원 규모(총지출 기준)의 2025년도 예산안을 의결했다. 지난 9월 국회에 제출된 정부안(677조4000억원)보다 4조1000억원 삭감됐다. 올해 예산(656조6000억원) 대비 총지출 증가율은 2.5%다. 세출 예산이 줄면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는 2.8%로, 정부 예산안(2.9%)보다 0.1%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예산안은 헌법에 명시된 기한(12월 2일)을 8일 넘겨 처리됐다.

당초 정부 예산안과 비교하면 전체 감액 규모(4조1000억원) 중 절반 이상인 2조4000억원이 예비비에서 줄었다. 예비비는 예측할 수 없는 예상 밖의 지출 또는 초과 지출을 충당하기 위한 자금으로 이른바 ‘정부 비상금’이다. 예비비는 기후재해·재난 등 목적을 정한 목적예비비와 그 외 일반 용도로 사용되는 일반예비비로 나뉜다. 특히 민주당은 목적예비비 편성에 부대의견을 달았다. 목적예비비 1조6000억원은 고교 무상교육과 5세 무상교육에 우선 지원하도록 한 것이다. 정부는 여기에만 1조원이 넘는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재해·재난 대응에 긴급 투입할 수 있는 여력이 380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민주당은 고교 무상교육 경비를 국비로 지원하는 특례 일몰기한을 올해 말에서 2027년까지 3년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정부는 여윳돈이 남아도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교 무상교육 지원특례 연장 법안은 이날 본회의에 상정 보류됐는데, 민주당이 법적 근거도 없이 목적예비비에 ‘꼬리표’를 붙여 예산을 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부에서도 지나쳤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생 수사도 차질 우려”

‘대왕고래 프로젝트’로 불리는 동해 영일만 심해가스전의 1차 시추 작업 예산도 505억원에서 8억3700만원으로 삭감됐다. 이미 시작된 시추 작업을 중단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부족분은 한국석유공사가 채워야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민주당은 법정 의무지출 외 감액된 예산은 기금 운용 계획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내용도 추가 부대의견으로 달았다. 통상 일반회계와 기금 간 거래는 가능하다. 세수가 부족할 때 기금을 가져다 쓸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삭감한 예산 부족분에 대해선 정부가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도록 원천 차단한 것이다.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 특수활동비(82억5100만원), 검찰 특정업무경비(506억9100만원)와 특활비(80억900만원), 감사원 특경비(45억원)와 특활비(15억원), 경찰 특활비(31억6000만원) 등은 전액 삭감됐다. 특활비 삭감은 마약범죄 수사와 보이스피싱 추적, 짝퉁 수사, 기업 기술 유출 범죄 등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여당과 정부는 이날 각각 증액 예산안을 제시해 막판 협상에 나섰지만 야당은 이를 거부했다. 여당은 이날 3조4000억원을 증액하자고 제안했다. ‘이재명표 예산’으로 불리는 지역화폐 예산 3000억원, 예비비 1조5000억원, 수사 경비(특활·특경 등) 500억원, 대왕고래 프로젝트 500억원, 민생 등 기타 예산 1조5000억원 등이었다. 정부도 지역화폐 예산(4000억원)을 포함해 고교 무상교육 국고 지원 예산 3000억원, 민주당 정책 요구안 9000억원 등을 반영한 2조1000억원 증액안을 제안했다. 민주당이 협상 과정에서 줄기차게 요구해 온 예산을 증액하겠다는 마지막 카드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지역화폐 예산 1조원 규모 확대, 대왕고래 예산 전액 삭감, 고교 무상교육 국비 지원 유지 등의 입장을 고수해 협상이 끝내 결렬됐다.

박상용/강경민/한재영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