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개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공간 … 성수동으로 ‘예술 임장’을 떠나다

셰프와 플랜티스트 부부의 집을 꾸민 '테라스 하우스'의 모습.
"똑똑, 집 보러 왔어요"

타인의 취향이 가득 담긴 집에 들어가보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삶의 향기가 묻은 안방과 거실, 응접실과 테라스를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는 더욱 흔치 않다. 지금, 서울 성수동에는 5가지 '취향 가옥'의 문이 열렸다. 김환기, 박서보에서 파블로 피카소까지 … 집안 곳곳에 걸린 작품들을 감상하는 건 덤. 모두 다른 직업을 가지고, 다른 일상을 꾸려가는 5인의 취향을 훔쳐보자. 프랑스에서 활동한 '건축 거장' 르 코르뷔지에는 집을 두고 '삶의 보물창고'라고 말했다. 그만큼 인간에게 집이라는 장소는 단지 휴식이나 숙식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개인에게 집의 의미는 더욱 커졌다. 주거와 업무, 휴식 공간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다.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존재들을 방 안으로 들여왔다. 그렇게 우리에게 집은 여가와 취미 그 자체가 됐다. 이 때 예술 작품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장고에만 '모셔두던' 그림과 조각, 설치작품들을 집 곳곳에 꺼내놓기 시작했다. 대림미술관의 개관 10주년 특별 전시 '취향가옥: Art in Life, Life in Art'의 아이디어도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방문해야만 관람할 수 있던 거장들의 작품을 집안에서 만난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은 현실이 됐다. 대림미술관이 성수동 디뮤지엄 대형 전시장 3층을 모두 뜯어 '진짜 집'을 들여놓으면서다. 이곳 전시장에 차려진 모든 공간은 단순히 구색만 갖춰 만든 '깡통 집'이 아니다. 거실과 방, 주방은 물론 화장실도 갖고 있다. 각 방 화장실에는 샤워 부스, 심지어 변기까지 설치했다. 옷장에는 누군가의 옷과 모자, 가방들이 진열되어 있고, 주방은 당장 요리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각종 식기류가 구비되어 있다.
40대 갤러리스트의 공간인 '듀플렉스 하우스'에 놓인 대형 설치작품.
디뮤지엄이 이런 사소한 디테일까지 정교히 신경쓴 이유는 관객에게 생생함을 선사하기 위해서다. 미술관이 아니라 부동산 임장을 온 것처럼 진짜 누군가가 사는 집을 구경하는 듯한 기분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관객에게는 거장들의 작품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일상의 꿈'을 이뤄 볼 기회다.

이번 전시에서는 5가지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5개의 '취향 가옥'이 펼쳐진다. 티 소믈리에와 영상 감독 모자(母子), 플랜티스트와 셰프 부부, 그리고 갤러리스트가 자신의 집을 흔쾌히 내줬다. 관객들은 각자 다른 직업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의 방을 직접 들어가보며 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취향가옥의 하이라이트는 집안에 숨은 예술 작품들이다. 김환기, 박서보, 파블로 피카소, 백남준 등 거장들의 작품이 일상 공간에 놓였다. 이뿐만 아니라 장 푸르베, 핀 율 등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가구들까지 만나볼 수 있다. 취향 가옥 안에 모인 작가들만 무려 70여 명. 집 안에서 300여점이 넘는 작업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같은 듯 다른 엄마와 아들의 공간
서울 성동구 디뮤지엄 성수에 차려진 '취향 가옥' 전시장 입구. 아들과 엄마의 공간인 '스플릿 하우스' 가운데 설치된 중정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넓고 고즈넉한 일본풍 중정이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한다. 이 집은 다도를 사랑하는 집주인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이 곳 정원을 중심으로 두 개의 입구로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집의 이름도 '분리됐다'는 의미의 '스플릿 하우스'다. 한 쪽은 티 소믈리에인 엄마의 공간, 다른 한 쪽은 영상 감독으로 일하는 아들의 방이다.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완벽히 다른 취향을 가진 어머니와 아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서울 성동구 디뮤지엄 성수에 차려진 '취향 가옥' 전시장 입구. 아들과
20대 영상 감독 아들의 방에 들어서면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현란한 색채와 그래픽이 돋보이는 작업들로 공간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는 작품은 일본 작가 아오카비 사야의 대형 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가득 채워넣은 대형 캔버스 가운데엔 연필 스케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미완성의 작업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야만의 방법이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이하고 특별한 작업을 추구하는 영상 감독의 직업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이다.아들의 방에서 나와 중정을 다시 거쳐 입장한 50대 어머니의 방은 현란하고 화려했던 아들의 방과는 180도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백색으로 꾸며진 공간은 그 입구부터 단아하고 차분하다. 티 소믈리에인 어머니의 공간에서는 다도를 하기 위한 다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자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선반에는 한국 전통 도자를 만들고 있는 기업인 광주요의 작품들이 진열돼 있다.
모자의 집을 꾸민 '스플릿 하우스' 중 티 소믈리에 어머니의 공간.
이 공간에서 빼놓지 않고 만나야 할 작품들도 존재한다. 먼저 복도에는 김환기의 대형 작품 2점이 걸렸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공간인 다이닝룸엔 박서보의 대표작 '묘법'이 손님을 맞이한다. 오랜 시간 차를 끓이고 음미하는 직업을 가진 만큼, 테이블과 의자도 모두 거장들의 작품으로 꾸몄다. 의자는 현대 디자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 이탈리아 작가 모니카 아르마니가 제작한 작품이다.

부부가 선사하는 환상적인 테라스
셰프와 플랜티스트 부부의 집을 꾸민 '테라스 하우스'의 모습. 침실로 들어가는 입구엔 피카소의 1969년 골판지 회화 작업들이 걸렸다.
계단을 따라 한 층 위로 올라가면 30대 부부가 꾸민 취향가옥이 펼쳐진다. 쉐프 남편과 플랜티스트 아내의 공통 관심사는 '자연'과 '건강'. 그래서 이들의 집에 걸린 예술 작품에는 모두 동물과 식물, 또는 음식이 등장한다. 부부의 집엔 대림미술관 소장품 중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파블로 피카소의 말년 작품인 1969년작 골판지 회화가 걸렸다. 캔버스가 아니라 종이 상자나 박스 골판지에 그린 피카소의 그림이 부부가 사랑하는 자연과 닿아있다는 데서 영감을 얻었다.

'테라스 하우스'라는 집 이름에 걸맞게 이 공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테라스다.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면 곧바로 눈앞에 드넓은 서울숲 풍경이 펼쳐진다. 관객이 바깥 공간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서울숲은 공간을 메우는 예술 작품이 된다. 번화한 도심 속에서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셰프와 플랜티스트 부부의 집을 꾸민 '테라스 하우스'의 모습.
환상적인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부부가 테라스에 들여놓은 가구도 특별하다. 미국 의류 브랜드 '칼하트'의 옷감을 리폼해서 만든 소파는 가구 디자이너 대런 로마넬리의 작품이다. 미국 LA에서 활동하는 그는 주로 버려지는 의류를 해체해 소파와 의자 테이블 등 가구를 만드는 '업사이클링 작가'로 알려졌다. 그는 죽은 옷에 새 생명을 불러일으킨다며 '닥터 로마넬리’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디즈니, 나이키 등 수많은 기업들과 아티스트들의 '협업 러브콜'을 받는 작가다.

로마넬리의 소파와 함께 전시된 도자기는 세라믹 작가 캔디스 로마넬리의 작품이다. 독학으로 도예를 시작한 그는 물레나 틀을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손만 사용해 도자를 빚어내는 '핸드 빌딩 기법'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같은 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두 작가는 부부다. 같은 집에서 취향을 공유하는 '테라스 하우스' 집주인 부부처럼, 로마넬리 부부도 집을 개조해 공유 스튜디오로 꾸며 작업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서로가 서로의 작업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

3층, 갤러리스트는 '이런 집'에 산다
40대 갤러리스트의 공간인 '듀플렉스 하우스'. 유명 가구 디자이너 핀 율의 빈티지 가구로 채워진 서재의 모습.
마지막 층에서는 많은 소품들을 모으며 살아가는 '맥시멀리스트'의 가옥이 펼쳐진다. 40대 남성 갤러리스트인 그는 갤러리를 집 안으로 옮겨놓기 위해 복층 구조의 집을 마치 전시장처럼 꾸몄다. 이 집은 복층 구조라는 데서 '듀플렉스 하우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갤러리스트답게 그의 집은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집 안에 들어서면 보이는 드로잉과 판화는 '모빌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가 그린 것이다. 사람 얼굴을 본따 만든 텔레비전 설치 작품은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의 작품 '본 어게인'이다. 근처 안테나 전파를 잡아 TV 화면을 통해 방송을 송출하는 작품은 설치 지역과 시간에 따라 그 내용이 변한다.
40대 갤러리스트의 공간인 '듀플렉스 하우스'. 2개의 층 중 위층에 자리한 일본 팝아트 작가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회화.
2개의 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대형 회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본 팝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그림이다. 그는 9살 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가족과 함께 산 속으로 도망쳤던 기억, 삶과 죽음 사이에서 두려웠던 기억들을 경쾌하고 화려한 팝아트로 승화시켰다.이번 '취향가옥' 전시는 대림미술관의 개관 10년을 기념하며 이뤄졌다. 초대전을 주로 할 뿐 좀처럼 수장고에서 소장품을 꺼내놓지 않는 대림미술관의 컬렉션을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전시는 내년 5월 18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