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제자는 왜 '비디오 시대의 렘브란트'로 불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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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시대의 렘브란트'호수에 놀러간 여섯 살 소년이 실수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다. 당황한 가족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소년의 몸은 끝도 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극도의 공포와 고통에 직면한 뇌가 보여준 환상이었을까. 소년은 훗날 “평온함을 넘어 행복을 느꼈다”는 뜻밖의 회고를 남겼다.
비디오아트 거장 빌 비올라
국제갤러리서 개인전
내년 1월 26일까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거기서 본 것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푸른 세상, 작은 사물들의 움직임, 한 줄기 빛….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서 저를 구하러 물속에 뛰어든 삼촌의 손을 뿌리쳤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겪은 이 같은 초현실적 체험은 빌 비올라(1951~2024)를 위대한 예술가로 키워낸 원동력이 됐다.지난 7월 세상을 떠난 비올라는 삶과 죽음, 물과 빛을 주제로 명상적이고 깊이 있는 비디오아트 작품을 만들어 ‘비디오 시대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얻은 거장이다. 지금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비올라가 세상을 떠난 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린 그의 전시인 데다, 그가 천착했던 ‘물’을 주제로 만든 의미 있는 초기작들이 여럿 나와 있어 특히 주목할 만하다.
백남준의 조수, 새로운 세계 열다
달걀노른자를 재료로 만든 안료인 템페라를 쓰던 서양 미술이 유화물감의 발명으로 한 차원 도약했듯, 비올라도 비디오라는 매체와 만나며 완전히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회화나 조각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1970년대 백남준 등 전위예술가들을 만난 뒤 비디오아트에 눈을 떴다. 1974년 백남준이 뉴욕주 시러큐스의 에버슨 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일 때 그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전시장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인포메이션’(1973)은 기술적인 오류로 잘못 녹화된 전자 신호를 담은 초기작이다. 작가는 “전자 매체라고 해도 물질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품”이라고 했다. ‘포 송즈’(1976)는 시간의 흐름과 순환을 주제로 한 작품. ‘실제로 흐르는 시간과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다를 수 있다’는 게 주제다. 이 밖에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1995년작 ‘인터벌’을 주목할 만하다. 두 개의 영상을 빠르게 교차하듯 상영해 관람객이 공간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물을 주제로 한 두 작품이다. ‘리플렉팅 풀’(1977~1979)의 첫 장면에는 수영장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등장한다. 곧이어 남자는 물에 뛰어들기 위해 도약하는데, 순간 시간이 멈춘 듯 허공에 같은 자세로 계속 떠 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시간이 멈춘 건 남자 뿐. 바람이 불 때마다 여전히 나뭇가지는 흔들리고 수면은 일렁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남자는 갑자기 물속에서 나체로 나와 화면 밖으로 걸어나간다. 영적인 재탄생, 시간, 죽음, 부활 등에 대한 고찰이 담긴 작품이다.하이라이트는 ‘무빙 스틸니스 : 마운틴 레이니어 1979’. 영상 작품과 이를 반사하는 물을 함께 설치한 ‘혼합 설치 작품’이다. 영상 속에서는 미국 워싱턴 주의 레이니어 산이 고요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다. 그런데 수면에 파동이 생기면 산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덧없이 일렁거리던 산은 물결이 거칠어질수록 추상화처럼 변한다. 이 작품을 두고 생전의 작가는 말했다. “산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거대한 산의 존재조차 내 마음(산을 비추는 물)에 따라 연약하게 흔들리고 사라질 수 있다는 사유를 담았다는 의미다.근원적인 질문을 묻다
비올라는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미국관 작가로 선정되면서 미국의 ‘국가대표 작가’로 인정받았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숱하게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특이한 건 그의 작품이 미술계 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인기 만점이라는 사실이다. 2017년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71만명을 끌어모으며 미술관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관람객 수를 기록한 게 증거다. 낯선 매체를 쓰는데도 미술계와 대중에 고루 인정받는 비결에 대해 평론가들은 “비올라의 작품이 오래 전부터 예술이 다뤄온 익숙하고 근원적인 질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 삶과 죽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죽음 후에도 우리의 존재는 계속되는지, 사람들은 그 짧은 생에서 어떻게 서로를 알고 사랑할 수 있는지 등. 새로운 기법과 파격적인 시도를 맨 앞에 내세우는 대부분의 미디어 아티스트들과 달리, 비올라는 이런 근원적이고 묵직한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리고 옛 미술 거장들과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다. 그가 렘브란트·카라바조 같은 거장들과 비견되는 이유다.재생 시간이 정해져 있는 작품 특성상 모두 둘러보려면 두 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생전 작가가 “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게 초기작들”이라고 말한 만큼, 그만한 시간을 써서 감상할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다. 전시는 내년 1월 26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