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차 한잔 : 소설가 한강의 ‘찻잔’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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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2024년, 그토록 온 국민이 바랐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드디어 나왔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지난 2000년 평화상을 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이 수상은 그가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의전신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할 때부터 예견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엄격함과 결연함이 느껴지는 차 한잔
지난 10월 그가 위원회로부터 유선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을 전해 받았을 때, 그는 “아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조용히 축하할래요.”라는 짧은 소감을 밝혔다. 그의 일생일대 가장 기쁘고 감개무량한 순간일 텐데, 좋은 음식과 술을 꺼내고 지인들과 거한 축하 파티를 마다하며 흔한 기자회견조차 고사했다. 그저 아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차 한잔’에 나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의 ‘차 한잔’이 사소한 폭력이나 변화에도 허물어지고 훼손되기 쉬운 일상의 연약함을 스스로 상기하고 소중하게 바깥의 관심으로부터 사수하려는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2024년 문학상 수상자 한강 - 전화 인터뷰]
의지를 재확인하듯, 한강 작가는 12월 6일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박물관에서 진행된 행사에서 앞서 언급했던 작은 도자기 찻잔과 메모를 기증했다. 한강이 기증한 찻잔은 잔잔한 옥색 빛이 감돌고 정갈한 느낌을 풍긴다. 표면에 맑고 푸른 유약을 입히고 물레속도와 방향을 따라 붓을 적당히 휘돌려 장식한 ‘평범한’ 찻잔이다. 한강은 해당 찻잔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며 사용하던 것이라고 밝혔다. 찻잔과 함께 기증한 손글씨 메모 속에는 작가가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 지키려 했다는 세 가지 루틴이 있다. 세 번째 항목은 “보통 녹차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 잎을 넣어 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셨다.”이다.차(茶)는 커피에 비해 느리다. 뜨거운 증기와 강한 압력으로 내리는 커피에 비해 차는 적어도 ‘우린다’는 동사가 완성되기까지의 기다림, 시간성이 내포되어 있다. 우선 찻잎을 일정 시간 따뜻한 물에 담그고 적정 농도로 우러나길 기다려야만 한다. 찻물을 85-90도 내외로 데우고 그 안에 넣을 찻잎, 찻잔과 주전자를 고른다. 그후 주전자에 찻잎을 적당량 넣고 찻잎의 맛과 향이 물에 우러나길 기다린다. 기다리고 상태를 살필 줄 알아야 차 본연의 맛, 수색, 풍미를 즐길 수 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한강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글쓰기를 업으로 차를 동력이자 쉼으로 여기는 나의 경험을 감히 한강 작가의 것에 견주어 짐작해 보면, 그 시간은 길지 않으나 책상에 앉아 썼던 글과 생각을 마음을 점검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다. 숨을 돌리며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 그것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써야 할 글을 위해 가득 채운 것을 비우고 걸러내야만 하는 시간이다. 한강 작가는 메모에서 두 어잔도 아니고 한 주전자도 아닌, ‘한 잔’을 간격을 두고 마신다고 했다. 자칫 차 마시기를 핑계로 늘어질 시간을 경계하며 스스로 단 ‘한 잔’이라는 제한을 두고 채근하는 작가의 엄격함, 결연함이 느껴진다.
나는 한강이 기증한 찻잔이 유명 도예가의 작품이나 혹은 값비싼 재료나 특별한 기법으로 만든 것이 아닌 소소한 공예품이라 오히려 좋다. 마치 박물관 속 무명씨 도공들이 만든 공예품을 보듯, 그의 잔은 어떤 레토릭없이 오로지 소설가 한강 작가의 것이어서다.
그의 차생활이 무거운 차솥을 아궁이에 내걸고 숯을 피우고, 물 건너온 자사 주전자에 화려한 다도구 악세사리를 곁들인 격식화된, 화려한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평범하기 그지없는 작고 푸른 찻잔은 작가가 말하는 매일의 글쓰기, 그 사이에 잠깐 스스로에게 허용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에 더할 나위없이 부합하는 사물이라는 생각이다. 누구는 풍미, 누구는 수색, 누구는 찻잎과 다양한 다도구, 액세서리 수집이 차생활의 즐거움이라 할 것이나, 적어도 한강 작가에게 음다는 단지 취미, 취향과 미음(美飮)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차인의 입장에서 찻잔뿐 아니라 녹차 주전자에 홍차 잎을 우리는 한강 작가의 음다는 무심하다. 그야말로 격이 없다. 작가라고 차의 맛과 색, 풍미를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나, 오로지 매일 ‘무엇을 어떤 수사로 써내려 할 것인가?’에 목표와 관심이 있는 작가에게 어쩌면 차를 핑계로 한 글쓰기와 글쓰기 사이에 스스로가 허용한 공식적인 ‘쉼’은 글쓰기만큼이나 절실하고 간절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에게 ‘한 잔의 음다’는 필요한 쉼을 담보하기 위한 핑계같은 것, 끊임없이 위로 성장하기 위해 대나무가 제 몸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결부를 짓는 마디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자못 ‘그가 종당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까지 ‘한 잔의 차’를 핑계로 비운 시간과 마디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공교롭게도 <소년이 온다>를 쓴 한강 작가의 인터뷰와 기증행사가 한밤 난데없는 계엄령으로 시국이 삼엄하고 엄중했던 다음 날 이뤄졌다. 시절 하수상함과 어수선한 시국에 묻힌 감이 있어, 미안하고 아쉽다. 작가의 여러 저작을 아우르는 특별강연은 특별히 이국의 땅에서 한국어로 이뤄져 감개무량하다.한강 작가가 기증한 손글씨 메모와 작고 푸른 찻잔을 보며, 나는 삶은 매일 소소한 것을 쌓아 만드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막힘과 좌절, 실패도 있겠지만, 꾸준히 소소한 마디와 굴곡을 넘어가다 보면 무엇인가 바뀌고 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는다. 그의 매일 몸과 마음으로 자판을 밀어 쓴 한 단어, 문장, 띄어쓰기가 단락을 이루고, 작은 장(章)이 되고 전체의 글이 되었다.
그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벤트나 요행을 기대하기보다 스스로가 행해야 할 소소함으로 채우다 보면 성취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 어려운 현실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소설처럼 특별한 혹은 특출난 인물, 사건이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 손과 가슴이 따뜻한 평범한 인물들의 실천, 연대 그리고 사랑만이 역사와 우리 삶의 동인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더해질수록 잔잔하고 보이지 않던 파동이 눈에 보이는 위력을 갖추고 그것이 분기점에 도달하기까지 축적되면, 일순간 봇물 터지듯 도저히 개인으로는 열기 불가능한 새로운 국면, 세계를 연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는 만고불변의 이치다.
홍지수 공예평론가•미술학박사•CraftMIX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