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외면할 수 없고 지극히 아픈 ‘이처럼 사소한 것들’

[arte] 이동윤의 아트하우스 칼럼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
영화 리뷰
사소한 것들은 우리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일상의 관습 속에 용해되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소비되어 버릴 뿐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영화화한 킬리언 머피 주연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잡으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연약한 사소한 것들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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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칼럼] 사소한 것들은 아름답고 큰 차이를 만든다 무엇이 이 존재들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손쉽게 지워지고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사소한 것들은 무엇인가? 킬리언 머피가 직접 제작에 참여할 정도로 애정을 가졌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두 종류의 사소한 것들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크리스마스가 되자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고민에 빠진다. 석탄 배달 업체를 운영하며 없는 돈에 직원들의 복지만큼은 넉넉히 신경 쓰는 그이지만 다섯 딸과 아내의 선물을 살 정도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타인에게 베풀고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멈추지 않는다.그러던 어느 날, 빌은 석탄을 배달하던 수녀원의 창고에서 우연히 한 소녀와 마주한다. 그녀는 출산한 아이를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중 몰래 창고에 숨어 있었다. 소녀를 통해 수녀원의 비리를 알게 된 빌은 깊은 고민에 휩싸인다. 마을의 모든 일들에 깊이 개입된 수녀원과 맞서는 건 자신이 일군 모든 터전을 잃어버리는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죄 없는 소녀들을 향한 폭력을 눈감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대의를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 과연 옳은 일일까? 빌이 마주한 딜레마는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가 매 순간 마주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영화는 빌이 석탄 창고에서 소녀를 만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된다. 전반부 서사는 빌의 일상과 그의 과거를 덤덤히 풀어낸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빌은 유독 말이 없고 감정을 절제한 채 일상을 세심히 살핀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은 채 응시하는 카메라, 움직이더라도 빌의 동선만을 애써 뒤쫓는 카메라의 무빙,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빌의 얼굴 클로즈업, 철저히 모든 순간을 빌에게 초점 맞추며 그의 감정을 따라가도록 설계된 촘촘한 장면들이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을 채우고 의미화한다.
빌과 그의 아내 에일린(에일린 월쉬)의 평온한 일상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서사의 초반부에서 사소한 순간들은 곧 빌의 일상 그 자체다. 힘든 역경을 딛고 넉넉하진 않더라도 화목한 가정을 이룬 한 가장의 일상은 그리 특별하지도,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빌의 일상을 사소하게 주목한 이유는 그 일상의 힘이 결국 빌로 하여금 큰 결심을 하게 하였다고 감독은 판단하기 때문이다.

후반부 서사는 수녀원의 비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갈등하는 빌의 불안감에 집중한다. 수녀원 내부로 들어가 원장 수녀(에밀리 왓슨)와 대면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처음으로 스테디 캠의 유려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마치 유령의 시선처럼 공중을 부유하듯 흘러 들어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빌이 발견하는 수녀원 내부의 단면들을 담아내며 그곳의 은밀한 치부를 드러낸다.
수녀원 내부로 들어가는 빌과 그를 바라보는 소녀들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전반부에서 카메라가 빌의 일상을 통해 그의 내적 감정에 주목했다면 후반부는 빌이 바라보는 곳, 존재하는 공간, 함께 하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주목한다. 전반부의 확장된 카메라 시선은 빌과 마을 주민들이 외면한 것들을 끈질기게 붙잡는다. 그리고 그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의 단면들이 바로 이토록 사소한 것들임을 주지시킨다.지극히 작은 존재의 사소함에 대하여

영화 속에는 작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이 등장한다. 한마을에 사는 믹 시노트의 아들, 디어머트(타이그 멀로니). 빌은 추운 겨울 거리를 헤매고 버려진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디어머트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발견한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낳았던 엄마, 자신과 엄마를 받아 주고 보살펴 줬던 윌슨 부인, 어쩌면 아버지일지도 모를 자신의 외삼촌, 영화는 빌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 진행하게 시키며 그의 외로웠던 소년 시절을 현재의 특정 대상들 속에서 발견하도록 만든다. 디어머트는 그들 중에서도 빌의 가장 외롭고 고통받는 자아를 대변한다. (두 사람의 첫 만남 또한 카메라는 두 사람을 하나의 프레임에 측면에서 동등한 구도로 담아낸다.)

그래서일까? 디어머트를 연기한 타이그 멀로니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추위에 부들부들 떨며 야생에 내던져진 힘없는 존재로서 현존한다. 곧 쓰러질 듯 위태롭게 떠도는 소년을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수녀원의 소녀들 또한 의식하지 못한다. 단 두 번 등장하는 역할임에도 디어머트는 빌이 수녀원에 감금당해 있던 세라(자라 데블린)를 향해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창고에 숨어 있던 소녀와 함께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빌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 아래 수녀원이 운영한 시설로 한국의 형제복지원 사건과 많은 부분 닮았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996년까지 운영되었고 결국 2013년 아일랜드 정부는 자신들의 방관을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원작자인 클레어 키건은 문제를 폭로하는 르포로서 소설이 기능하길 원치 않았다. 오히려 왜 그러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대중은 침묵했는지 질문한다. 정부가 사소하다며 치부했던 자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의 현실은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겪은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며 외면했던 우리의 책임을 이야기해야 할 때는 아닌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질문한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연말연시의 설렘 속에서 2024년 대한민국의 12월, 이처럼 사소하다고 치부하고 있는 존재들은 누구인지 한 번쯤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본다.이동윤 영화평론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메인 포스터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 아일랜드 출신 작가 클레어 키건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되었으며, 은곰상(조연 연기상)을 수상했다.
▶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12월 11일 개봉해 CGV 아트하우스를 비롯한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