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괴물" 죽음에서 다시 살아온 불멸의 프랑스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
입력
수정
[arte] 정연아의 프렌치 시크프랑스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가장 위대한 비극 여배우
역대 최초의 "국제 만능 스타"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잔다르크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 여성
19세기 말 프랑스 연극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 - 1923)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여자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 순회공연을 떠난 최초의 국제 슈퍼스타였다. 미국 텍사스 순회공연에서는 전석이 매진되고 그녀의 팬들이 말을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하여 극장에 도착하기도 했으며 극장 밖에서 기다리고 그녀가 타고 가는 마차를 쫓기도 하여 무장한 카우보이들이 공연장을 지킬 정도였다고 한다.사라 베르나르는 수많은 연극 무대에서 거의 60년을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여주인공, 여왕, 공주, 성녀 때로는 햄릿 같은 남자의 역할로 열정적인 연기를 보이고 심지어 다리 절단 수술 후에도 앉아서 공연하기도 했다.
사라 베르나르는 '신성한 여인', '극장의 황후'라는 닉네임으로 불렸으며,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연극 무대에서 열정적인 그녀의 모습을 보고 <황금의 목소리>라고 찬양했으며 프랑스 예술가 장 콕토(Jean Cocteau)는 연극 영화계에 '신성한 괴물'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는데 물론 이는 그녀를 일컬었던 말이었다.관이 놓여있고 원숭이와 카멜레온, 악어들이 산책하는 집벽이 검은색 새틴으로 드리워진 파리의 그녀 집에는 빅토르 위고가 선물한 인간의 두개골이 전시되어 있고, 당시 귀족 사이에 유행하던 이국적인 동물을 애완동물로 기르고 있었다. 1879년 런던에서의 첫 번째 공연 여행에서 원숭이를 시작으로 그녀는 서커스에서 카멜레온 일곱 마리, 늑대개, 사자, 퓨마 같은 동물을 파리의 집으로 데려와 키웠다. 심지어 파티에서 악어 '알리 가가(Ali Gaga)'는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셔 죽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번은 남미에서 동면한 보아뱀을 프랑스로 데려왔다가 갑자기 동면에서 깨어나 총으로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동물들을 다시 서커스로 돌려보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주민들의 개를 잡아먹는 사건이 일어나거나 여배우와 동물을 받아주지 않는 호텔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1880년 아킬레 멜란드리(Achille Mélandri)는 관속에 누워 있는 사라 베르나르의 사진을 찍었는데 이사진은 미국까지 알려져서 그녀가 죽었다는 루머가 퍼졌다. 그러나 이 사진은 그녀가 기획한 사진으로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인기 관리 해프닝이었다.비극 여배우로 무대 위에서 수백 번 죽는 역할을 하며 이 관속에서 죽는 연기 연습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핵을 앓고 있는 여동생 레지나가 그녀의 방에 와서 지내는 바람에 침대가 모자라 관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그녀는 비즈니스 우먼의 기질도 뛰어나 이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판매까지 하여 죽음에서 다시 살아온 불멸의 여배우가 되었다.로댕(Rodin)도 질투한 조각가 사라 베르나르
1874년경 사라 베르나르는 연극배우로 명성을 얻었으나 반항적인 성격과 생활 방식으로 연극 역할 제안을 한동안 받지 못했다. 그래서 25세에 유명한 줄리안 아카데미(Académie Julian)에서 조각과 그림을 배우고 예술가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의 유화 작품과 청동, 대리석 작품은 파리의 카르나발레 박물관, 쁘띠 팔레,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익사한 손자의 시신을 안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그린 <폭풍우 이후(After the Storm)>의 세부 묘사를 보면 그녀의 재능에 감탄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가부장적 사회였던 그 당시 로댕과 같은 프랑스 예술가 인사들의 시기와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런던 순회공연을 떠날 때는 자기 작품을 가지고 가서 판매하여 연극계와 예술가들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189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탄생한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포스터
사라 베르나르는 비극 지스몬다(Gismonda)를 1895년 1월부터 공연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연극을 위한 포스터가 급히 필요했던 그녀는 파리의 인쇄업자 르메르시에르(Lemercier)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인쇄소의 모든 직원이 이미 휴가를 떠나고 체코 출신의 27세 청년 혼자 남아있었다.
그는 미래의 아르누보의 대가가 될 젊은 무명 예술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였다. 알폰스 무하는 지스몬다 공연 포스터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제작하여 파리 시내 곳곳에 부착하였고 파리지앵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받아 사라 베르나르와 알폰스 무하의 협업이 6년간 지속되었다.브랜드의 앰배서더로, 예술가의 뮤즈로
사라 베르나르의 여배우 명성이 하늘을 치솟자 향수, 비누, 화장품, 담배, 약, 술 등의 브랜드에 그녀의 이미지로 광고 포스터를 제작하여 역대 최초의 브랜드 엠버서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고 포스터에는 <사라 베르나르처럼>, <사라 베르나르의 공주 같은 우아한 제스쳐> 등 지금과 다를 바 없는 광고 문구를 사용했다.사라 베르나르의 친구 화가 루이즈 아베마(Louise Abbéma), 조르주 클레린(Georges Clairin)은 그녀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고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쥘 바스티앙-르파주(Jules Bastien-Lepage), 조반니 볼디니(Giovanni Boldini) 그리고 알프레드 스티븐스(Alfred Stevens) 등 수많은 예술가의 뮤즈가 되기도 하였다.
앤디 워홀이 1980년에 작업한 10명의 20세기 유대인 시리즈(Ten Portraits of Jews of the Twentieth Century)에서도 사라 베르나르의 초상화를 찾아볼 수 있다. 사라 베르나르는 여자 화가 루이즈 아베마의 애인이기도 하여 앤디 워홀의 이 작품을 통해 엘지비티(LGBT)와 팝아트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불멸의 슈퍼스타
사라 베르나르는 전 세계 순회공연으로 프랑스어 전파에 공헌했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병원이 된 극장에서 간호사로 봉사한 공로로 191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명예 기사 훈장(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을 수여 받았다.
사라 베르나르의 장례식에는 전 세계에서 보내온 꽃수레들이 끊이지 않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파리 거리에 나온 수십만 명의 조객들은 <잔다르크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 여성>의 죽음에 슬퍼했다고 한다.그녀는 사망한 후 40년이 지난 1960년에 미국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입성 되었으며, 지금까지 입성된 프랑스 여자는 단 6명뿐이다. 반항적이었지만 관대했던 그녀는 사회적 관습을 비웃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끊임없이 일반 대중의 호기심과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스캔들을 조성했다. 평생 사치와 그녀의 별난 사생활 그리고 그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우리의 마음속에 전설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다.정연아 패션&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