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모던보이' 주름잡던 곳…100년 후에도 여전히 'MZ 핫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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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연말이면 바뀌는 풍경들이 있다. 필자가 가장 오랫동안 봐왔고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 분수에 전구가 설치되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이다. 고전 양식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비록 정해진 기간 동안이지만 1년 중 가장 생기가 도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광경을 보면 진짜 연말이 됐음을 실감한다.
과거-현재 모습 품은
'韓 최초 백화점' 신세계 본점
1930년대 문을 연
미쓰코시백화점
시인 '이상'도 찾아
옥상서 차마시기도
6·25땐 美 PX 활용
1963년 '신세계' 간판
시대가 흘러도 존재감
몇 년 전부터 충무로 신세계 본점이 가세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외벽을 대형 스크린으로 사용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일부러 이곳을 찾을 정도다. 올해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신세계 본점 전체를 1292㎡ 초대형 사이니지가 감싼다는 것이었다. 100여 년간 기념비처럼 서 있던 건물의 외관이 사라져 버린다니.1900년대 초반 한국 문학에는 ‘진고개’(충무로2가 일대)라는 곳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이유는 ‘뭘 사러 가는 곳’이다. 이곳과 얽힌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당시 자본주의의 유입과 이것이 사람들의 삶에 자리 잡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진고개에 속하지 않지만 이곳의 연장선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미쓰코시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이다. 이곳은 1930년대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절충식 르네상스 양식 외관을 갖춘 건물이다. 건물이 지어졌을 당시에는 조선은행 본관(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우체국 등과 함께 근대적 경관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했다.
서울이 경성이었을 때, 이곳에는 수많은 모던보이와 모던걸 그리고 자본의 표상에 압도된 사람들이 빈번히 방문했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는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상이 자주 찾았다고 알려진, 당시 미쓰코시백화점의 옥상정원은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경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이 천재 작가가 날기를 결심한 이곳은 지금의 백화점에서도 그 역할을 이어가 남산타워가 보이고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트리니티가든이 됐다.이 백화점은 해방 이후 동화백화점으로, 6·25전쟁 때는 미군 PX로 활용됐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서 주인공 이경이 일을 하는 ‘휘황한’ 곳, 환쟁이들의 초상화부가 있던 곳이 이곳이다. 1963년이 돼서야 신세계백화점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여러 번의 보수 공사를 거쳤고, 본래 4층 건물이던 것을 6층으로 증축하며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이런 과정에서도 중앙의 계단을 보존하는 등 건물이 지닌 역사성을 지키는 방식을 추구했다. 100여 년의 시간 동안 건물은 그 자리에서 빠르게 변하는 시대와 함께했다.
그랬던 신세계 본점의 외관이 미디어 파사드로 바뀐 것은 열린송현을 감싸고 있던 높고 긴 돌담이 사라진 것만큼이나 서울에서 오랜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전벽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옛 양식의 파사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영상이 퍽 아름다웠기에 그 아쉬움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외관을 다 덮어버린 미디어 파사드에 영상으로 재현된 본래 파사드의 모습이 나타난 것을 보니 이 또한 그 건물이 담당할 시대적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100여 년 전에 급변하는 시대와 함께 나타난 혁신적이던 건물이 다시 한번 시대에 맞는 옷을 입고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는 것. 다시 긴 시간이 지난 후 그 건물은, 또 그 장소는 어떻게 시대를 감당하고 있을까.
배세연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