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는 파리를 간다더니 하와이 들러 타히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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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김경수의 길 위의 미술관▶[이전 칼럼] 천경자 1편: 뱀을 그리는 여자, 천경자를 찾아 100년 전 고흥으로 시간여행
타히티 향기를 품은 꽃과 여인의 이야기… 천경자의 여정
천경자 편 ③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이전 칼럼] 천경자 2편: 꽃도 있고, 뱀도 있다… 천경자 그림 속 '행복한 슬픔'
타히티, 신문회관, 베트남갑자기 웬 타히티일까요? 1969년 45세의 천경자는 소망하던 파리로 향합니다. 신문회관(현 프레스센터)에서 '도불전'을 열고 유학이라 하기보다는 긴 여행에 가까운 길을 홀로 떠납니다. 천경자는 미국에 들렀다가 하와이를 거쳐 사모아로, 다시 타히티로 건너갑니다. 곧장 파리로 가지 않았어요. 원시적 인간 내면세계를 표현했던 고갱의 자취가 보고 싶었을 겁니다. 고갱은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재현이 아니라 상상력과 깊은 사고로 탄생한다고 했습니다. 천경자 자신의 미학과 공통된 부분이 많았지요.타히티의 사람들은 붉은 히비스커스를 귀에 꽂고는 인생의 회한, 절망, 굴욕과는 상관없어 보였습니다. 비행기 승무원 야마시다가 머무는 호텔로 옮겨 플루메리아꽃을 머리 가득 장식한 무희들의 북소리에 맞춘 춤을 보며 술 한잔을 합니다. 그때 그린 스케치입니다.천경자는 왜 파리를 소망했을까요? 현재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미국으로 옮겨갔지만, 그 시절에는 파리가 화가들에게 선망의 지역이었거든요. 한국 미술계는 전쟁 복구 후 1960년을 전후로 세계화를 꿈꿉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상황으로는 해외 전시나 유학은 꿈꾸기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파리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해외 전시는 언론에서 대서특필 되곤 했습니다. 많은 화가가 세계 중심지로 나가 화업을 이루고자 하였고, 김환기, 이응노, 박서보 등이 이미 진출해 있었습니다.1969년 45세의 천경자도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여름에 출발해서 1970년 봄까지 8개월이 넘게 타히티,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합니다. 파리의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유화 수업도 몇 개월 정도 받았는데 당시의 유화 누드화가 몇 점 남아있습니다.귀국하는 비행기에서 하얀 산맥이 무수히 솟은 북극, 한밤중인데도 백야라서 산 그림자가 환한 북극을 내려다보면서 비로소 '썩은 동아줄' 상호와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잘 돌아오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경험하며 '화가 천경자'에 집중한 여행은 인생 후반기 천경자를 더욱 성숙하게 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장미 한 송이라도 들고 들어왔다는 천경자의 집 뜰은 꽃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옥인동에서 파온 라일락이 유난히 꽃이 많이 피어, 새로 이사한 서교동 집에도 보라색 구름이 내려앉은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썩은 동아줄’ 상호와 싸웠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내 사랑은 끝났다. 상호는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이요, 나는 캐서린 아버지가 데려온 집시 고아 히스클리프였다.” 천경자는 인생의 후반 홀로 그림 그리는 삶을 선택합니다.
홍익대학교도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만 집중합니다. 훌륭한 여성 화가들을 키우고 싶어 화실을 열고 고갱을 기리며 ‘노아노아 화실’이라 이름 짓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운영하기란 쉽지 않아 곧 문을 닫게 되고 작업에만 전념합니다. 이후 천경자의 여인상이 정립됩니다.
1972년 베트남전쟁 시기 종군 화가로 20일간 베트남에 갑니다. 화실과 교수직도 모두 그만둔 상태에서 새로운 경험도 하고 경제적 문제도 해결할 방법이었습니다. 150호 크기의 두 점의 대작을 모두 국방부에서 사주어 200만 원의 큰돈을 받아 경제 사정이 풀리기 시작합니다.1970년 중반부터 천경자 특유의 여인상이 제작됩니다. '길례 언니'를 필두로 꽃과 여인을 주제로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여인상들이 탄생 됩니다. 그녀의 작업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농익어서 울림을 전합니다. 아름다운 향기 가득한 작품들은 빛과 채색, 환각, 화려한 슬픔 등으로 해석되는 천경자 양식을 대표하게 됩니다.
화가 이봉상은 ‘동양화의 개척 면에서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작가‘라 하였고 최순우는 ‘현대와 전통을 배색, 탐구하는 작가’로서 “그가 체험한 인생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슬픔과 황홀함을 모두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되새김질해 화려한 슬픔의 환상을 그렸다.”고 평합니다.이십 대에는 살아내기 위하여 뱀을 그렸던 화가였습니다. 중년이 되어 그녀의 작품엔 ‘꽃’이 많고 ‘여인’이 많습니다. 꽃과 여인과 삶의 고독이 화려하게 불어옵니다. 영혼을 울리는 바람이 되어서.김경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