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나면 함께 불부터 꺼야, 어쩌면 '최초의 무혈 혁명'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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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소연의 탐나는 책아주 나쁜 것에서도 배울 점을 굳이 꼽자면, 이번 계엄 사태와 탄핵 집회 사이에서 세대 간 화해의 실마리를 보았다. 젊은 층을 위태롭게 보던 기성세대는 추운 밤 누구보다도 시위 현장을 늦도록 지키는 2030 세대를 든든하게 바라보았다. 또한 가수를 응원하던 응원봉을 시위 현장에서 흔드는 문화를 '실물 촛불 세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라 했다. 민주주의를 무력지배 시대로 퇴행시킬 수는 없기에, 정치 지향점을 떠나서 많은 이들이 모처럼 한마음이 되었다.
‘좁은 회랑’에서 찾은 민주주의의 불빛과 여전한 숙제
대런 아세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좁은 회랑』
장경덕 옮김 (시공사)
젊은 층도 '꼰대’로 부르던 기성세대가 겪었던 폭압의 시대, 그들의 저항과 희생에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이는 "부모님 극우 유튜브 구독 끊어드리기”로 이어질 거라 예언한 지인도 있었다. 물론 "설계"나 "주도" 없이 비판에만 능한 치들도 문제가 많지만, 불이 나면 모두 함께 불부터 꺼야 한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한 권의 책이 있다.좁은 회랑 : 함께 걷기에는 왜 어려운 길일까?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런 아세모글루와 정치학자 제임스 A. 로빈슨의 <좁은 회랑>은 국가와 사회가 균형을 이루며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좁은 길을 묘사한다. 여기서, 사회는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등 행동하는 시민 조직이다. 독재적 억압과 무정부적 혼란 사이의 ‘좁은 회랑’은 자유와 번영을 위한 필수 경로다. 저자들은 국가와 사회가 각기 강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할 때 민주주의가 지속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아시아의 강국 싱가포르를 떠올려보았다. 싱가포르는 종종 권위주의 아래 경제적 성공을 이룬 예외적 사례로 거론된다. 하지만 인구 600만의 소규모 도시국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가능했던 모델이기도 하다. 중앙집중식 정책이 빠르게 실행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가 존재한다. 싱가포르의 경제적 번영은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남기며, 이러한 시스템이 한국처럼 민주주의를 경험한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그것이 문門이 아니라 회랑인 까닭은 자유를 성취하는 일이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억제하고,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며, 국가가 시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까지 우리는 회랑 안에서 먼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과정인 이유는, 국가와 엘리트층은 사회가 채운 족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고, 사회의 여러 부문들은 서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하는 법을 터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 <좁은 회랑> 출처. 밀리의 서재
여전히 위태로운 경제와 새로운 돌파구정치적 일탈을 제거한 것만으로 경제 문제는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한국은 중국과의 경제적 연결과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사이에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의 리딩 기업들은 인공지능(AI) 시대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해 위기감을 키우고 있다.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경제 전략이야말로 특권을 누리는 정치 엘리트들의 제1과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위기 속에서 기업과 국가 모두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권위주의적 기업 문화를 벗어나 수평적 소통과 창의적 협력을 장려해야 한다. 규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실패를 용인하고 잠재력을 발휘할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환경이 필요하다. 수많은 책에서 혁신은 ‘끄트머리’에 있는 개인과, 그들이 맘껏 협력하는 기업에서 나온다고 강조하지 않는가. 개인과 기업을 뒷받침 할 ‘국가의 경제 전략’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막대하다. 미국도 중국처럼 국가와 기업의 공생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정치는 내수지만, 경제는 글로벌 무대다.
세대와 지향점의 벽을 넘어 손을 맞잡았던 그 몰입의 순간이 일상으로 이어질 때, 민주주의의 좁은 회랑은 더 넓어질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의 기회를 우리 손으로 전체 시스템을 새로 짜는, ‘최초의 무혈 혁명’의 기회를 맞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실력을 낭비하지 말고, 미래 세대를 위한 건설적인 경제 시스템을 새로 짜는 일에 쏟아 부었으면 한다. 이제는 뛰어난 개인들이 기업과 국가를 선택하는 시대다. 물적 생산은 탈세계화가 가속되지만, 사람 차원의 세계화는 한국에서 이제 시작된 게 아닐까. 젊은 세대는 영어를 잘한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