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언니에게

[arte] 최지인의 탐나는 책

김혜순 시집 『어느 별의 지옥』(문학과지성사, 2017(초판: 1988))
우리 동네에는 언니가 있다. 엄마뻘이지만 존칭 대신 별명으로 부르고 술 마시면 놀리기 쉬운 언니다. 언니는 40년 전 남영동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나는 그날 새벽 언니를 떠올렸다.
사진. © 최지인
광장에서 한 야구팬의 외침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민주화 이후에 태어나 평화 속에서 문화적 풍요를 누려올 수 있었던 지난 삶이 앞서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 속으로 나아간 자들과 이들을 따른 무수한 사람들 덕분이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독히 잦았던 경제 위기와 실업과 88만원 세대와 용산과 세월호와 강남역 살인과 국정 농단을 지나며 전혀 평탄한 과거로 기억될 수 없었음에도 우리의 삶과 사회는 어떤 기본적인 믿음 위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 믿음이 조각난 날에 나는 김혜순의 시집 『어느 별의 지옥』 서문을 떠올렸다.
출판사 직원이었던 나는 책의 3교 다음 ok를 놓고, 가제본을 끝낸 책을 들고 시청의 군인들에게 검열받으러 갔다. 어느 땐 그들이 지운 잉크로 본문이 다 지워진 책이 숯 덩어리가 된 적도 있었다. 저자를 찾아가 한없이 울었다. 후에 그 책은 대사 없는 무언극으로 공연되었고, 그 저자는 나의 가족이 되었다. 노동운동을 선구적으로 시작했던 여성의 일대기를 번역서로 출간한 적도 있었는데, 그 책의 역자인 그녀의 거처나 전화번호를 대라면서 경찰서에 따라가서 뺨을 일곱 대 맞은 적도 있었다. 맞으면서 숫자를 세었다. 하숙집에 엎드려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 출판사를 결근하고 썼다.
- 김혜순, 「시인의 말」, 『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사, 2017 (초판: 1988)

처음 이 대목을 읽던 날의 공포를 기억한다. 홧홧하게 타오르는 뺨과 먹먹한 고막과 무너지는 존엄에 관해 생각했다. 그녀가 출판사를 결근하며 하루에 한 편씩 써 내려간 시들을 읽으며 먼 과거의 순간에 이입하면서도 이를 낯설게 느꼈다. 그런데 이 미지의 과거가 올겨울 나의 뺨을 치고 지나간 기분이다. 어두운 방, 침대에 앉아 내가 지금 다듬고 있는 소설들을, 이 작품들을 쓴 작가들을 떠올리며 근심했다.

김혜순의 시가 늘 시대와 그 시대의 언어와 그 시대를 받아내는 제 자신의 몸과 싸워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시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어김없이 독서의 재개를 촉구하면서 지금-여기의 지평에 미리 도착한 미지의 말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야 깨닫는다.
- 오연경 해설, 『어느 별의 지옥』, p. 109
김혜순 시집 『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사, 2017(초판: 1988))
우리 동네 언니는 이제 잘 산다. 그 뒤에 대학원도 다녔고 은퇴를 늦추며 아직도 일한다. 찬 바람 부는 거리 위에서 언니에게 더 이상 악몽이 없는 날들이 이어질 수 있길, 누군가 언니와 같은 사람이 다시 생기지 않길 진심으로 바랐다.문학은 힘이 없어서 힘이 있다. 시는 온몸으로 활활 타면서 진리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내가 배운 문학은 올해 가장 놀라고 노엽고 두렵던 그 순간 내게 왔다. 김혜순이 1988년에 묶었던 미지의 언어가 지금-여기 다른 이에게도 닿아 그/녀를 일으키고 깨울 수 있기를 빌어본다.

최지인 문학 편집자•래빗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