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요일' 도마엘 감독이 손가락 댄스로 표현한 7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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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 반 도마엘 감독 연출칠흑같이 어두운 무대에 하얀빛을 뿜어내는 스크린이 내려온다. 곧 낭낭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셋을 세면 당신은 잠이 듭니다. 하나, 둘, 셋…”
14일 공연 리뷰
그리고 남자가 말한 것처럼,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태에서 나는 숲길에 놓인다. 깊은 숲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두 개의 손가락. 그 손가락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위의 상황은 실제 최면 치료가 아닌, 지난 토요일에 열린 한 공연의 오프닝을 서술한 것이다. ‘하이브리드 퍼포먼스’라고 명명된 이 공연은 <제8요일>, <토토의 천국>, <이웃집에 신이 산다> 등의 영화로 알려진 벨기에 출신의 감독, 자코 반 도마엘과 그의 아내이자 안무가 미쉘 안느 드 메이가 이끄는 벨기에의 창작 집단 ‘키스 앤 크라이 콜렉티브’의 작품, <콜드 블러드>이다. 이 듀오는 지난 2014년 <키스 앤 크라이>라는 작품으로 한국을 찾은 이후 10년 만에 귀환했다.
하이브리드 퍼포먼스, 혹은 총체극이라고 불리는 이 공연은 (손가락을 이용한) 마임, 무용, 연극, 영화 그리고 문학 등이 어우러진 복합 예술 공연으로, 스태프들이 인형극 무대 같은 미니어처 무대를 설치하고 카메라로 촬영하는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그 과정의 결과물인 영상, 혹은 영화는 내레이션 (한국판 공연의 내래이션은 유지태 배우가 맡았다) 과 함께 전달된다.<콜드 블러드>는 관객이 꿈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전제로 총 7개의 죽음을 관찰한다.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 자살, 감자 퓌레 알레르기에 의한 죽음, 연쇄 살인마의 죽음, 전쟁에 의한 죽음, 비행기 사고 등을 포함한 7개의 죽음은 각기 다른 상황과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펼쳐진다. 공연이 시작되면 미니어처 세트를 오가며 무용수들의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사전에 녹음된 내레이션과 음악이 더해져 완성되는 한 편의 영화가 스크린에 실시간 투사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무대 위 공연과 스크린 속 영화의 경계를 넘어, ‘꿈’과 같은 판타지의 차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는 미니어처 세트에서 활약하는 ‘인물’이 손가락이라는 사실이다. 세트가 완성되면 검은 옷을 입은 (주체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아티스트가 등장해 손가락, 즉 검지와 중지만을 이용해 캉캉 춤을 추거나,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연기한다.중심인물인 손가락은 공연의 ‘키’가 되는 일곱 개의 죽음을 재현한다. 죽음에 이르는 인간, 죽음을 염원하는 인간, 죽음에 희생되는 인간 등. 갖가지 죽음에 대한 상념들은 손가락의 운율을 타고 스크린에 전복된다. 실로 신비롭다 못해 경이로운 경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나노 댄스’ (nano-dance)라고 불리는 이 손가락 댄스는 앞서 언급한 미쉘 안 드 메이가 창시한 것으로 그녀의 첫 작품, <키스 앤 크라이> 이후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콜드 블러드>는 매체의 사용과 진행 방식이 적잖이 생소한 것이라 처음 한두 개의 에피소드를 보는 동안 약간의 학습과 적응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생소함의 문턱 너머의 아름다움과 심오함은 공연의 정체성만큼이나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이러한 실험적인 방법들로 빚어지는 ‘죽음’에 대한 작은 이야기들은 연출을 담당한 자코 반 도마엘의 전작들과 일맥상통하다.도마엘은 그의 영화 작업을 통해서도 꾸준히 죽음에 대한 ‘콩트 (conte)’를 만들어왔다. 굳이 ‘트’라고 표현을 한 것은 그가 그리는 죽음은 비극적이거나 대단원의 끝이 아닌, 삶의 패러디, 혹은 유쾌한 에피소드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컨대 컴퓨터를 해킹해서 인간들에게 죽음을 문자로 전송하는 신 (<이웃집에 신이 산다>), 죽은 어머니에게 가기 위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초콜릿을 잔뜩 먹고 빌딩에서 뛰어 내린 조지 (<제8요일>) 같은 캐릭터들은 도마엘 감독이 가진 죽음에 대한 시선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단 두 번의 공연으로 한국 공연이 마무리되었지만 여러 가지로 깊은 자국을 내고 간 퍼포먼스가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예술 매체가 차원 (dimension)과 장르로 규정되어 왔다면 이번 공연 <콜드 블러드>는 차원과 장르, 시간과 공간, 감각과 육신을 초월하는 초경험적 창작물이 될 것이다.
▶▶[관련 인터뷰] "손가락 춤을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옮기는 공연, 어떠세요"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