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판 걷는 안중근의 고뇌 담았죠… 명화처럼 클래식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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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얼빈’ 우민호 감독 인터뷰…오는 24일 개봉“안중근 장군이 남긴 말과 뜻을 관객들이 느끼면 좋겠단 취지였거든요. 그런데 지금 시국과 맞닿으면서 읽히잖아요. 이 또한 영화의 숙명이지 않을까요.”
“역사는 반복되지만, 금세 희망도 보죠…‘하얼빈’은 여운이 남을 영화”
문학, 미술, 클래식, 그리고 영화까지…. 어떤 예술이건 좋은 작품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명력을 가진다. 내재적인 예술 본연의 가치가 훌륭해서도 있지만, 적절한 때를 맞이하면 마치 순풍에 돛을 단 듯 폭발적인 힘을 낸다.오는 24일 개봉하는 영화 ‘하얼빈’에선 안중근(현빈 분)이란 조선인이 자신을 노린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프랭키 릴리 분)가 이런 말을 남긴다.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다.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
100여년 전 역사를 재구성한 시대극의 대사 치곤 묘하게 기시감이 든다. 하얼빈까지의 고된 여정을 가는 동안 ‘우리 앞에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선 아니 된다’라거나 ‘불빛을 들고 나아가야 한다’는 안중근의 내레이션은 더 공교롭다. 작두라도 탄 듯 영화가 개봉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던 걸까. 감독을 맡아 각본까지 쓴 우민호 감독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개봉을 앞둔 19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이래서 우리가 역사를 되짚고 돌아봐야 하는구나 싶었다”고 웃었다.‘하얼빈’은 올해 하반기 내내 부침을 거듭한 한국영화의 마지막 흥행 기대주다. 처음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속된 말로 ‘국뽕’을 자극하는 안중근을 소재로 한 영화란 이유였지만, 개봉 직전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어지러운 시국에서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작년 이맘때 개봉한 ‘서울의 봄’이 프리뷰라면, ‘하얼빈’은 리뷰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마침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처럼 한국 근현대사를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를 선보인 우민호 감독이 ‘서울의 봄’ 제작사와 만든 영화란 소식이 더욱 눈길을 쏠리게 했다.
우 감독은 이에 대해 “3년 전부터 기획한 영화로 독립군의 숭고한 여정을 영화라는 매체에 담고 싶었다”면서도 “(스스로도) 시대극이 필요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란 역사가 반복되고,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겪고 있지만, 또 금세 희망을 보지 않았느냐”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역사를 되짚고 돌아봐야 하는구나 싶었다”고 했다. 영화에 대한 지나친 확대해석이 조심스러우면서도, 경직된 일상에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거란 뜻이다.우 감독에게 안중근은 일종의 도전이다. 우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대체로 돈, 권력, 출세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악인의 일대기를 그리는 피카레스크적 로망이 가득한 영화들이 대부분이고, 영웅적인 선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중근은 영화 ‘영웅’을 비롯해 연극, 소설 등에서 자주 다뤄져 전형성이 강하다.우 감독은 “우연한 기회에 안중근의 자서전을 읽었는데, 그런 큰일을 한 나이가 서른살에 불과했단 사실에 놀랐다”며 “안중근도 처음부터 영웅이었던 게 아니라 하얼빈까지 가기까지 실패도 하고 비난받기도 했는데, 그 과정의 고뇌와 두려움을 담아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뜨거운 가슴을 안고 독립군을 이끄는 영웅과 거리가 멀다. 걸핏하면 흔들리고 번민하기 일쑤라 다른 독립군 동료들의 도움이 없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우 감독은 “기존에 안중근을 다룬 작품들과 다르게 찍고 싶었다”면서 “거사에 성공할지, 성공한다 해서 독립을 곧바로 쟁취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복잡했을 마음을 얼음판 걸으며 고뇌에 휩싸인 모습으로 강조하려 했다”고 했다.영화는 자극적인 연출이 강했던 우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밋밋하다. 대사마다 연극적인 톤이 강하고, 주인공 클로즈업은 최대한 자제해 지루한 면이 있고, 장면들은 마치 명암의 대비가 강한 바로크 시대 그림을 보는 것 같다.이에 대해 우 감독은 “숭고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연출을 설마 몰랐겠느냐”라며 “독립을 위해 싸운 모두를 보여주고 싶었고, 마치 명화의 한 장면처럼 클래식하게 찍고 싶었다”고 했다.
우 감독은 ‘하얼빈’이 여운이 긴 영화로 기억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들이 펼쳐질 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란 것에 ‘끝까지 가야 한다’는 안중근의 가르침을 관객들도 느끼고 위로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