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드래곤도 푹 빠졌다…여자만 쓰는 줄 알았는데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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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인문학새빨간 카디건에 금색 체인 끈이 달린 커다란 누비 가죽 가방을 메고, 고운 분홍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누군가가 은갈치 같은 자동차를 타고 공항에 나타났다. 얼핏 보면 영락없이 촌스러운 중년 여성을 묘사한 게 아닐까 싶지만, 뜻밖에 K팝의 원조 격인 지드래곤(GD)의 공항 패션이다. 바야흐로 스카프 전성 시대의 도래를 화려하게 알리는 패션 리더의 깜짝 재림이었다.
한국신사 이헌
기원전 210년 中 진시황 때부터
군인 계급·신분 나타내기 위해 써
문맹 위해 응급처치법 그려넣기도
1930년대 실크 스카프 제작되며
상류층 여성들 패션템으로 유행
작은 충격이 있었지만 크게 놀랄 필요는 없다.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은 늘 의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니까. 할머니 같다는 그래니 룩, 김장 담그다 온 것 같다는 김장 룩, 헌 옷과 빈티지가 모인 동묘 시장에 다녀온 것 같다는 동묘 룩 등 지드래곤의 공항 패션으로 새로운 신조어가 남았다.남성의 화려한 스카프 활용은 대단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기원전부터 있었고, 많은 패셔니스타를 통해 주목받아온 것을 재해석했을 뿐이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으로 아내 혹은 어머니가 옷장 속 거울 앞에 주렁주렁 매달아 둔 스카프를 꺼내 적극적으로 활용해보기를 많은 남성 독자에게도 슬쩍 권해 본다.
고대 이집트 왕비와 진시황의 스카프
역사가 오래된 매력적인 천 조각, 스카프는 우리 곁으로 어떻게 다가왔을까. 첫 스카프 착용자는 고대 이집트의 왕비 네페르티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원전 1345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네페르티티의 흉상에는 머리 장식에 기다란 트윌리 같은 스카프가 감겨 있다. 역사상 첫 스카프라 여겨지는 것이 목보다는 머리를 장식하는 데 사용된 점을 고려하면, 지드래곤이 뒤집어쓴 머리 장식은 오랜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중국의 첫 통일 제국 황제인 진나라 시황 때도 남성들이 스카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사망한 후 수많은 병사 모형이 황제와 함께 묻혔는데, 발굴된 유적에는 흙으로 빚어 구운 모형들이 계급에 따라 소재를 달리한 다양한 스카프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스카프는 이미 계급과 사회적 분류의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도 스카프가 널리 활용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여성보다는 남성이 땀을 닦거나 멋있어 보이기 위해 사용했다. 여성의 전유물로 생각되던 스카프가 본디 남성성을 강하게 띤 액세서리였던 것이다.
스카프 = 용맹한 남성들의 전유물
시간이 많이 흘러 17세기 유럽의 용병으로 유명해진 크로아티아 출신 기병대원들의 모직 스카프도 역사의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동구권의 다양한 나라 출신 용병들이 다소 오합지졸의 분위기로 서유럽의 군사 공백을 메꿨는데, 이들에 대한 수요가 더 늘자 이들을 뭉뚱그려 부를 호칭이 필요했다. 그중 대표성을 띤 크로아티아 출신들 덕분에 이 용병들은 프랑스어로 크로아티아인을 의미하는 ‘라 크라바트(la cravat)’로 불리게 됐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목을 장식한 멋진 스카프도 그렇게 불리다가 넥타이로 변형돼 넥타이를 일컫는 단어가 됐다.이렇듯 스카프는 사회적, 집단적 계급의 상징이자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던 매우 남성적인 액세서리였다. 하지만 급격하게 여성의 전유물로 변화하게 되는데, 그 핵심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관련돼 있다. 즉위와 동시에 푸른색 스카프를 가슴 부근에 넓게 드리운 초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를 계기로 유럽 전역의 왕족과 귀족에게 실크 스카프가 널리 애용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보어 전쟁 참전자 8명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손으로 뜬 모직 스카프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여왕이 손수 뜨개질로 만든 스카프를 전공자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하사했을 때 전장의 서러움을 겪은 이들은 아마도 놀라운 따사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양차 대전 동안에도 털실로 만든 스카프는 전장 병사들의 필수품이 됐다. 사랑하는 아내와 여자친구 혹은 어머니의 손길을 통해 전해진 따사로움은 전장의 병사들에게 보온의 도구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 고향을 향한 향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애국심과 전우애 같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자아내는 아이콘이 됐다.
헤드 스카프 두르면 최고의 겨울패션
한편, 문맹의 병사들에게는 전략적인 이유로 스카프가 제공되기도 했다. 특정 무기의 사용법과 전쟁 중의 응급처치를 그림으로 설명한 매뉴얼이 네모난 천에 인쇄돼 공급됐다. 병사용 매뉴얼 손수건 혹은 스카프는 입대한 병사의 문맹률이 급격히 떨어지며 사라졌지만, 그 활용성을 높이 평가한 에르메스 소유 집안의 선구안으로 1937년 인쇄된 실크 스카프로 새 생명을 얻게 된다.실크 스카프는 상류층과 유명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실크 스카프 활용법의 교과서라 불릴 만한 인물은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다. 다양한 스타일링을 선보였지만, 특히 부러진 팔을 감싸는 데 붕대 대신 실크 스카프를 활용한 모습은 후대에 그 다양한 활용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그를 비롯해 숱한 할리우드 여배우가 오픈카에서 우아하게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도록 도운 바로 그 헤드 스카프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평생 ‘최애템’이기도 했다. 바로 그 헤드 스카프가 지드래곤을 통해 다시 유행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길고 긴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금 돌아온 스카프.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의 스카프 활용이다. 유난히도 길고 무덥던 여름 날씨뿐 아니라 전례 없는 가을 폭설은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모스크바보다 춥다는 대한민국의 혹한에 더해 올겨울엔 어떤 기후변화가 찾아올지. 우리 체열의 상당 부분이 머리와 목에서 발산된다고 하니, 지드래곤을 핑계 삼아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써보자. 60년이 훌쩍 넘은 “감기 조심하세요~” 그 유명한 감기약 광고를 떠올리면서, 스타일에 추억 한 방울 더하면 최고의 겨울 스타일이 될 것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