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지금 우리는 정류장에 있다

발레 속 '파세'라는 동작처럼
새 출발을 위해선 잠깐 멈춰야

이단비 공연 연출가·방송작가
정류장은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는 곳이지만, 정류장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곳은 장소를 잇고, 사람을 잇고, 시간을 잇는 중요한 공간이다.

발레에서도 정류장과 같은 의미를 지닌 동작이 있다. 바로 파세(pass)다. 파세는 발레의 모든 작품과 발레를 연습하는 모든 과정에서 늘 함께하는 동작이다. 파세는 한 다리를 바로 세워 중심축을 잡고, 다른 다리의 무릎을 구부려 발끝을 중심축이 된 다리의 무릎 위치에 가져다 놓는 동작이다. 클래식 발레에서 파세는 턴 아웃 상태로 이뤄지기 때문에 그 모습을 앞에서 보면 두 다리 사이에 삼각형 모양이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을 ‘마법의 삼각형’이라고 부른다.발레에서는 파세를 통해서 들어 올린 다리를 앞이나 뒤 혹은 옆으로 보낼 수 있다. 모든 동작이 파세를 거치는 건 아니지만 아라베스크, 애티튜드 등 발레의 기본적인 주요 포즈와 동작은 파세를 거쳐서 만들고, 공중에서 하는 ‘롱 드 장브 앙 레르’도 파세 상태에서 이뤄진다. 흥미롭게도 파세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지나가는’이라는 뜻이 있다. 영어 패스드(passed)와 마찬가지다. 즉, 파세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패스포트다. 이 마법의 삼각형을 ‘발레의 정류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종종 파세를 한 상태로 일정 시간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경우 동작이라기보다 하나의 포즈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움직이기 위한 동작에 속하고, 르티레는 포즈(자세)에 속한다.

파세는 그저 한 다리를 세우고 다른 다리를 구부리는 것뿐인데도 그게 ‘~한 것뿐이다’라는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동작이다. 이 동작을 할 때 몸의 선을 아름답게 만들고 단단하게 몸을 잡고 있으려면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파세를 하려면 우선 턴 아웃을 정확하게 해야 하고, 코어의 힘을 단단하게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또 몸의 에너지는 하늘을 향하면서 풀업 상태로 만들어야 하고, 중심축이 되는 다리부터 머리까지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잡아야 한다. 동작을 수행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는 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모던 발레에서는 허리가 옆으로 빠지는 오프밸런스 동작으로도 수행할 수 있다. 파세는 마법의 삼각형이지만 마법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참 힘든 시기에 ‘롱 버케이션’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삶이 삐거덕거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그 시기를 신이 선물한 긴 방학이라고 생각하라는 의미의 제목이자 그런 내용을 담은 드라마였다. 드라마가 나오고 거의 20년쯤 지나서 봤는데도, 낡고 오래된 화질과 분위기 안에서 당시 내가 느낀 슬픔과 막막함에 대한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파세는 짧게 지나가기도 하고 긴 방학처럼 머물기도 한다. 그건 침체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중요한 지점이다. 발레에서 파세가 있어야 앞으로 뒤로 혹은 옆으로 다음 동작을 이어서 갈 수 있는 것처럼, 정류장이 있어야 가고 싶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것처럼, 삶에서도 파세가 있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정류장 안에서 오래 서성일 때는 긴 방학이라고 생각하며, 파세 상태로 오래 내 몸의 호흡을 잡고 균형점을 찾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11월은 가을과 겨울을 잇는 파세의 계절이다. 이제 겨울로 들어간다. 한 해를 마무리 짓고, 또 한 해를 맞이한다. 문득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이라는 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