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봐야 진정한 귀족" 유럽 청년들의 '그랜드 투어'를 아시나요

[arte] 전유신의 벨 에포크

17~19세기 유럽 귀족 청년들
2~3년간 떠나는 '그랜드 투어' 대유행
그랜드 투어는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의 귀족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여행의 한 양상을 일컫는다. 투어리스트들은 당대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주요 도시들을 두루 거친 뒤, 고대 유적과 르네상스 미술을 볼 수 있는 이탈리아의 로마, 피렌체, 베니스 등을 2-3년에 걸쳐 여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랜드 투어는 여행을 통해 문화적 교양을 쌓고 다른 나라의 귀족들과 교류하는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한 성인 귀족을 양성하기 위한 필수 관문이었다.

예술 분야에서는 독일의 작가 괴테(1749-1832)가 자신의 그랜드 투어 경험담을 소개한 ‘이탈리아 여행’을 출간한 바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영국의 소설가 메리 셸리(1797-1851)도 남편인 퍼시 셸리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그 경험을 소설 집필에 반영했다. 역시 영국 출신의 소설가인 찰스 디킨스(1812-1870)도 1년간 이탈리아에 체류했던 그랜드 투어의 경험을 ‘이탈리아의 초상’이라는 에세이로 남기기도 했다.19세기에 접어들면서 기차와 같은 교통 수단이 발달하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해외 여행과 중산층의 단체 여행 등이 보편화되면서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그랜드 투어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여행을 통해 문화적 교양을 쌓고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그랜드 투어의 본래적 가치를 여전히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기간이 짧아지고 여행지의 수도 줄어든 약식의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영국의 화가인 윌리엄 터너(1775-1851)나 프랑스 출신의 화가 카미유 코로(1796-1875) 같은 풍경화가들이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이상적인 자연을 모습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대신 날씨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직접 보고 그 변화의 양상을 포착해 그린 이들의 그림은 이후 인상주의 미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윌리엄 터너, 베니스-도가나와 산 조르지오 마조레, 1834년경,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카미유 코로, 베니스의 아침, 1834,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 소장.
19세기 이후로는 현대적인 그랜드 투어에 참여하는 미국인들도 증가하게 된다.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부모는 과거의 그랜드 투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장기간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살아가던 부유한 미국인이었다. 사전트는 이들이 피렌체에 머무는 기간에 그곳에서 출생했다. 당시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이동해 활동하는 일은 많았지만 사전트처럼 부모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리스트의 삶을 살면서 유럽에서 미술 교육을 받게 된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사전트는 19세에 미술 중심지 파리로 이주해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면서 카롤뤼스 뒤랑 같은 당대의 유명 화가로부터 사실주의 화풍을 학습했다. 1884년 파리 살롱에서 발표한 작품 ‘마담 X’(1884) 둘러싼 선정성 논란이 계기가 되어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파리 미술계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사전트는 런던으로 건너가 초상화를 주로 그리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존 싱어 사전트, 마담 X의 초상, 1884,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이때 그린 대표작 중 하나가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1885-86)이다. 영국식 정원에 핀 꽃들과 자신의 딸을 포함한 두 소녀를 그린 이 그림으로 그는 영국 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랜드 투어리스트였던 부모의 영향인지 그 역시 이후로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과 미국을 오가면서 화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86, 런던 테이트 브리튼 소장.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전망 좋은 방’(1985)은 현대화된 그랜드 투어가 일반화되었던 20세기 초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국의 소설가 E.M. 포스터가 1909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행을 떠나는 주체는 상류층 계급에 속한 젊은 여성 루시 허니처치다. 주인공 루시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 르네상스의 문화를 학습하며 그곳을 찾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 여행을 마친 후, 루시는 보수적인 영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인물인 약혼자 세실과 결별하고 대신 피렌체에서 만난 조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조지는 루시에게 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 인물, 즉 전통을 탈피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인물이다. 과거의 그랜드 투어가 주로 남성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20세기 초에 집필된 E.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에서는 여행을 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바뀐 것 역시 변화된 시대의 일면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의 여성 루시는 그랜드 투어를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영화 ‘전망 좋은 방’ 2020년 개봉 포스터.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앞서 언급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서 혹은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 여행은 결국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출발점이 되었다. 지금 내가 머무는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전망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여행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다. 다만, 어딘가 경치가 좋은 곳으로 떠나야만 여행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그랜드 투어를 경험한 과거 예술가들의 작품은 우리를 잠시나마 춥고 엄혹한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안식처이자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알 수 없는 미래를 벗어나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나도록 해줄 이정표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