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앤디 워홀'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화려한 세상이 열렸다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
케이이치 타나아미 개인전
'아임 디 오리진' 내년 6월 29일까지
팝아트 작가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개인전 '아임 디 오리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
"나에게 대담하고 흥미로운 일이 아니라면 해봐야 의미가 없다"

지난 8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가 케이이치 타나아미가 생전 신념처럼 여긴 문장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술'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에 그는 항상 새로운 세상을 탐구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타나아미는 '동양의 앤디 워홀'로 이름을 알리며 아시아 미술계에 '팝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가가 됐다.최근 걸그룹 뉴진스의 앨범 표지와 컨셉 전반을 디자인하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는 '일본 팝아트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도 타나아미를 뒤따라 작업을 펼쳤다. 대중에게는 다카시가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은 미술 사조인 '슈퍼플랫'의 선구자가 타나아미이기 때문이다.
팝아트 작가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개인전 '아임 디 오리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
아시아 예술계에 팝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동양의 앤디 워홀'로 불린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미술 세계가 서울에 펄쳐졌다.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타나아미의 개인전 '아임 디 오리진'을 통해서다. 전시 규모도 크다. 그가 작고하기 직전까지 총 60년간 제작한 작품 700여 점을 선보인다. 케이이치 타나아미를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이 한국에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타나아미는 섬유 도매를 하던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만화가가 되는 것을 꿈꿨다. '정통 미술'의 길 대신 디자인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픽 디자인학을 전공하게 된 타나아미는 졸업장을 받은 직후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록 밴드'였다. 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몽키즈가 타나아미에게 앨범 표지 디자인을 의뢰하며 그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서서히 각인시켰다.
팝아트 작가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개인전 '아임 디 오리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
그는 1960년대 미국에서 앤디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을 접한 뒤 큰 영감을 받았다. 순수 예술로 여겨지던 회화와 디자인, 애니메이션, 포스터, 만화와 광고 등 상업예술이 만나 탄생하는 색다른 매력에 푹 빠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한 회화, 조각, 설치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란한 색감과 경쾌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작품들엔 그의 고통과 슬픔의 기억이 숨어 있다. 그는 유년시절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산 위로 가족들과 피난을 떠나던 모습, 1980년대 초반 결핵으로 입원했을 당시 생사의 경계에서 봤던 환각을 팝아트로 풀어냈다. 자신을 괴롭히던 기억 속 트라우마를 화려한 작품에 녹여낸 것이다.

이번 전시는 대림미술관의 전층과 별관을 모두 털어 그의 발자취를 선보인다. 대림미술관이 개관한 후 역대 최대 규모로 꾸려진 전시다. 조각과 회화에서부터 애니메이션, 영상까지 눈을 사로잡는 타나아미의 팝아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팝아트 작가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개인전 '아임 디 오리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
미술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나타나는 1층 공간엔 압도적 크기를 자랑하는 설치작 '백 개의 다리'가 관객을 맞이한다. 세속과 신성함 사이를 잇는 다리를 상상하며 만든 작품이다.

한 층 위로 올라가면 그가 서양 팝아트와 하위문화에 영향을 크게 받았을 당시 제작했던 작업들이 놓였다. 이곳에서는 그가 그린 영화 포스터, 콜라주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가장 주목받는 작품은 1967년 제작된 '노 모어 워' 시리즈다. 천에 그림을 그려넣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했는데, 미국 만화와 팝아트에서 얻은 영감을 집대성한 작업이다. 1960~1970년대 미국 대중문화와 관련된 이미지를 콜라주처럼 모아놓은 '콜라주 북' 시리즈도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다.
팝아트 작가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개인전 '아임 디 오리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
3층 공간은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기억들로 채워졌다. 그가 겪었던 전쟁과 죽음의 트라우마, 환각 등의 심리적 불안감을 숨겨둔 작품들을 선보인다. 결핵으로 투병하던 당시 그렸던 '도키와마츠' 시리즈와 어린 시절 경험했던 기억들을 풀어낸 '생명 탄생' 시리즈들을 관람할 수 있다. 4층 공간도 오직 케이이치 타나아미만이 선보일 수 있는 '특이한 작품'들이 가득 채워졌다. 기괴한 모양을 가진 생물들을 한데 모아 탄생시킨 조각상 '기상천외한 몸'이 그의 특이한 작업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만화가 후지오 아카츠카와 손잡고 만든 '거울 속의 내 얼굴' 과 '기억의 미로' 작품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관객에 공개된다. 타일의 정수를 보여주는 조각, 영상, 실크 스크린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작가 대신 '이미지 디렉터'라고 칭할 만큼 여러 장르에도 손을 뻗었다. 아디다스, 유니클로 등 브랜드들과도 활발히 협업하며 다양한 제품들을 탄생시켰다. 본 전시관에서 몇 걸음 벗어나면 나타나는 별관 '미술관 옆집'엔 그가 펼친 다양한 콜라보레이션 작업들을 선보인다. 스트리트 브랜드, 바비 등 다양한 브랜드와 아티스트들과 협업해 제작한 제품들이 놓였다. 그가 작업 인생 내내 이어 온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전시다. 내년 6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