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 말곤 내세울 것 없던 땅을 '예술의 섬'으로 만든 안도 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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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정민의 열린 공간과 사유들예술이 그려내는 대상은 무엇일까? 화가 세잔은 자신이 그리는 것을 ‘자연과 평행을 이루는 구조와 조화’라고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낯설게 바라보며 모든 것을 명징하게 규명하기만 하려는 사물의 세계를 벗겨내고 그 위에 가치의 세계를 채색해야 한다. 건축이 채색하는 캔버스는 실제 세계 그 자체다. 작품과 세계 사이에 캔버스, 종이 혹은 스크린과 같은 경계가 없기에 예술가의 세계관이 손쉽게 투영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거대한 대지라는 캔버스 위에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은 수많은 물리적 사회적 제약을 극복해야 하고, 또 여러 사람과 협업할 수 있는 유연함도 갖추어야 한다.
"경계를 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품다"
안도 다다오 '나오시마 프로젝트'
그러려면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확신과 그 확신을 밀고 나갈 대단한 열정과 에너지의 소유자여야 할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제안하는 그런 유형의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바로 그런 유형의 인물로서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서라도 손꼽을 만하다. 젊은 날 사각의 링 위에서 자신의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어야 했던 그는 링에서 내려온 뒤에도 자신의 스트레이트를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꽂아 넣으려 했다. '건축을 전공한 적이 없지만, 독학만으로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었다'는 그의 서사는 건축이라는 낯선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흥미도 충분히 끌어낼만하다.화가가 하나의 주제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신만의 화법을 구축해 나가듯 건축가의 언어도 반복된다. 안도 다다오는 국내에서 가장 쉽게, 또 빈번하게 그 언어를 경험할 수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 때문인지 많은 공간이 그처럼 노출 콘크리트를 원료로 하여 문화적 랜드마크가 되는 것을 꿈꾸지만 동일한 원료를 사용했다고 해서 동일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차이는 빛과 물, 나무 혹은 자연 경관과 같은 모든 요소를 예술적 질료로써 승화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에서 나온다. 그렇게 세상을 이루는 물질의 본질을 이해하고 재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건축가의 손에서만이 독특한 형태의 건축적 경험이 탄생한다. 또 그런 공간에서만이 해소되는 욕구가 있다. 자꾸만 무언가를 채워 넣으라고 말하는 세상에 저항하며 의식적 날숨을 내쉬고 싶은 욕구. 그 날숨은 인간을 위해 특정한 목적의 공간으로 기능해야 하는 건축의 본질적 측면을 거부한 무용한 공간에서만이 내쉬어진다.그런 공간에 놓일 때만이 나라는 존재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무언가로 기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그런 허용이 이루어진다. 안도 다다오의 공간에서 그런 경험이 가능한 것은 그가 다양한 물질을 예술적 질료로 승화시키는 능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경력 초기부터 단순한 공간의 목적을 넘어서 사회적 기능을 구현하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초기 작품에서부터 외부 광장의 개념을 건축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내부 광장이란 개념을 자신의 설계한 공간에 도입했다.또 좁은 부지의 주거 공간에 중정을 도입해 불편한 주택을 만들었다며 악의적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사회적 기능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바라보면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누군가의 소유물이 될 수밖에 없는 건축 분야에 공공의식을 강조해 온 그가 수년에 걸쳐 지역 재생이라는 사회적 기능성을 꿈꾼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섬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섬에 가고자 하는 마음은 강렬해졌다.
빛을 질료로 승화시키는 건축의 언어나오시마는 시코쿠 가가와현에 속한 8㎢ 면적의 작은 섬이다. 혼슈와 시코쿠 사이에 있는 세토 내해의 평온한 물결에 둘러싸여 있다. 가가와현이라고 하면 우동의 본고장이라는 것 외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또 일본 현지인들에게도 여행하기에 녹록지 않은 곳이라고 평가되는 듯하다. 그런 섬이 어떻게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일까?
이 섬에서 140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오사카에서 태어난 안도 다다오는 오사카시의 강에 있는 섬 중 하나인 나카노시마에 지상에는 도시공원을 지하에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문화시설을 넣으려는 자신의 구상을 오사카시에 제안했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직접적으로 거절당한 그 구상을 나오시마에 구현했다고 언급한 적은 없지만 지중미술관(地中美術館)이라는 그 이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 지상은 자연에 그대로 돌려주고, 대지 아래에 다양한 형태의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자연의 경관을 유지하려 한 컨셉은 아마도 오랫동안 그가 품고 있던 건축에 대한 꿈이 아니었을까 싶다.항구에서 미술관까지 걸어 올라가며 나무들의 우듬지 위로 삐져나온 공간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길을 따라가다 갑자기 길쭉하고 낮은 콘크리트 위에 한자로 지추미술관이라고 적힌 벽이 맞이할 뿐이다. 방문객이 적길 기대하며 가장 이른 시간에 예약했지만, 입구 앞에서는 마치 국제적인 예술 축제 개막을 알리는 전조이기라도 한 듯 여러 종류 언어와 억양이 한데 뒤섞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이곳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건축적 언어는 사선이다. 사선은 공간의 깊이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 공간에서는 빛이라는 질료를 공간에 담아내기 위한 기법으로 쓰인다. 기울어진 매끈한 마감의 콘크리트는 태양광을 비스듬히 반사해 내며 어두운 통로로 빛을 깊숙이 끌어들이고 거의 모든 벽과 천장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의 틈이 있어 그곳을 통해 스며드는 빛이 어둠과 대비되며 추상적 면을 형성한다.
이 지중미술관은 세 개의 각기 다른 컨셉의 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들을 연결하는 공간에 그 컨셉이 가장 두드러진다. 한국에 있는 뮤지엄 산(Museum SAN)에서 볼 수 있던 것과 유사한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정오쯤이 되자 태양광이 콘크리트 위에 하얗게 바랜 역삼각형을 만들고, 그 모서리는 벽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선의 모서리와 맞닿는다.전시 공간 사이를 우회하는 램프를 따라 걸으면 그 틈으로 스며들어온 빛이 이쪽으로 와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인공적인 조명도 또 그 틈새를 막고 있는 유리도 없다. 마치 화가들이 후기로 갈수록 디테일을 점점 더 생략하는 것처럼 이 공간에는 인공광, 그리고 외부에 내부를 가르는 유리와 같은 물질들이 극단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그렇게 극단적 단순함을 치닫는 공간의 언어는 클로드 모네 공간에서 정점에 다다른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 공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수직축으로 15도가량 기울어져 있는 벽면이다. 이 벽은 먼저 관람객의 눈에 어둠을 인식하게 만든다. 벽의 좌측으로 들어서면 전시실과 입구 중간에서 무용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전시실만큼이나 커다란 이 공간의 어둠은 전시실을 향해 열린 개구부로 들어오는 빛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빛은 그 강도와 상관없이 오직 어둠 속에서만 빛이 될 수 있다. 환하게 쏟아지는 듯했던 그 빛은 막상 그 중심에 보이는 모네의 수련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천정의 모서리로 반사되어 들어오는 희미한 산란광이다. 몇 번의 반사를 거친 산란광은 전시실을 미약한 빛으로 채울 뿐이지만 그 빛을 찬란하게 느껴지도록 전시실만큼이나 큰 공간과 전시실을 나누고 그사이를 직사각형의 개구부로 연결하여 관람객이 먼저 어둠을 만나도록 설계한 것이다.천장과 벽이 만나는 곳은 둥글려져 있어 빛과 그림자의 선이 형성되지 않도록 하고, 바닥에는 작은 대리석 조각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다른 관람객의 발소리조차 흡수해 낸다. 이 모든 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내기 위한 건축가의 의도다. 몇 번의 반사를 거쳐 스며들어온 희미한 빛으로 바라보는 모네의 그림은 선명하지 않다. 마치 화가가 수십 년에 걸쳐 계속해서 하나의 정원을 반복해서 그린 것처럼 그 화가가 보았던 모든 풍경을, 흐린 날이던 맑은 날이던 그 시선 그대로를 재현하려 한 것처럼 보인다. 빛이라기보다 어스름에 가까운 조도 속에서 대가의 그림을 보는 최초의 경험은 건축가의 의도를 명료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경계를 넘어 걸어 들어가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는 언제나 경계가 있다. 이 지추미술관에서의 경험을 한마디로 아우르면 경계를 넘어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월터 드 마리아 공간은 그 주제가 명확하다.
<시간/영원/시간없음>이라는 작품명에서 볼 수 있듯 거대한 해시계인 양 만들어진 공간인데 시간의 흐름을 명료하게 알려주기 위한 시계가 아니라 선형적이고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무시간성을 느껴보라고 말하는 시계다.네 개의 벽면에 자리한 금색의 기둥들은 패턴이 있는 듯하면서도 불규칙하다. 천정의 개구부에서 들어오는 태양광이 만들어낸 밝은 직사각형이 시침 초침을 대신한다. 시간 그리고 무시간성이라는 주제보다 더 특별한 점은 이 공간 자체가 작품이기에 관람의 방향이나 그 주체가 희미해진다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걷는 소리, 또 서 있거나 걷는 모습마저 중앙의 검은 구체에 비치며 하나의 작품이 된다. 즉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 전시를 경험하는 관객 또한 하나의 주제가 된다.
제임스 터렐 작품인 <오픈 필드> 역시 로스코의 추상적 색면과 같은 공간 속으로 관람객이 걸어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계단 아래에서 보면 단색의 평면으로 보였던 공간이 계단을 오르고 나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오픈 스카이>역시 공간 자체가 작품인데 높게 형성된 천정에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있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을 사각의 프레임으로 보여준다.벽면에 붙은 의자는 15도 정도 비스듬히 기울어진 콘크리트 등받이로 되어있어 거기에 기대어 하늘이 만들어내는 그림을 보라는 제안을 한다. 물론 하늘은 굳이 여기를 가지 않아도 언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제안 아래서 일상적 풍경은 예술적 경험으로 승화한다. 이 지추미술관에서는 건축과 작품이 함께 기획되고 설계되었기에 이렇게 작품과 관람객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수준의 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곳은 입구 공간을 제외하고는 촬영이 불가능하다. 그 제약은 단순히 관람객을 상자에 태워 일률적 동선으로 작품을 관람하고 퇴장하게 만드는 기계적 발상과는 다르다. 그것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인증하고 싶은 욕구도 벗어던지고 관람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만큼은 그 작품 그 자체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스스로 작품이 되는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안은 이 섬에 있는 다른 공간들, 이우환 미술관,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안도 뮤지엄 등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 제안은 성공한 것일까? 이렇게 외진 곳에서 사람들을, 공간을 통해 끌어들이려는 그의 구상은 성공한 것일까?돌아오는 배편을 기다리며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들른 작은 식당에는 미술관 입구에서처럼 온갖 언어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쓰는 이방인들이 이 외진 섬까지 찾아온 것은 한 건축가가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어온 꿈, 즉 경계를 허물어 사회적 단절의 회복을 꿈꾸는 그런 공간이 주는 특별한 경험을 얻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닐까?안도 다다오는 자신의 저서 <건축을 꿈꾸다>에서 이 섬이 관람객과 함께 성장하는 그런 공간이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단지 관광 사업으로 지역을 재생하려는 타산적 프로젝트가 아닌 예술이 주는 가치의 세계를 경험하도록 만든 공간의 설계는 그 목적을 명확하게 만들고 대지 아래에서 고요히 웅크림으로써 이 공간은 건축가가 꿈꾸었던 세계와 평행을 이루는 구조와 조화를, 사회적 기능성을 함유한 공간으로써 실현한다.박정민 건축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