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책만 있는 게 아니었네… 2024 '올해의 책' 11선

아르떼 필진 선정 '올해의 책'
주요 출판사 편집자 11명 중 7명
올해 인상 깊은 책으로 문학 골라

동시대 청춘 그려낸 소설 주목
절판 20년만에 재출간된
문학의 쓸모 찾은 산문집

시대 충실하게 기록한 논픽션도 추천
세월호 사고, 역사, 투자 등 분야 다양
"올해 출판계는 한강과 비(非)한강으로 분위기가 갈렸죠."

한 출판사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모두를 놀라게 만든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의 책은 200만부 가까이 팔렸다. 한강뿐 아니라 부친 한승원 작가의 작품이나 한강이 읽었다고 알려진 소설까지 덩달아 주목받은 한해였다. 반면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노벨상 이슈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아쉬움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올해도 서점엔 수만권의 새책이 쏟아져 나왔다. 나에게 의미 있고 감동을 주는 책은 이름 있는 상을 받았는지 여부와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국경제신문은 문화 종합 플랫폼 아르떼에 '탐나는 책'을 연재 중인 국내 주요 출판사 편집자 11명에게 '올해의 책'을 한 권씩 추천받았다. 올해 출간된 책 중 자신이 소속된 출판사의 책은 제외하고 골랐다. 출판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 간 책 중에서 당신의 '인생 책'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동시대를 그려낸 소설에 주목

문학 작품 추천이 두드러졌다. 추천받은 11권의 책 중 7권이 소설 혹은 산문집이다. 그중에서도 김애란, 김기태, 조해진, 김지연 등 올해 문단에서 주목받은 국내 작가 소설을 추천한 편집자들이 많았다.

'젊은 거장'이란 수식어가 따르는 김애란 작가는 올해 들어 13년만에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냈다. 각자 비밀 한 가지씩 가진 고등학생 세 명의 시점을 오가면서 그들이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통상 성장은 어떤 성취나 성공과 연결되지만, 김애란은 무언가를 그만둠으로써 나아가는 성장을 그렸다. 이 책을 추천한 백다흠 은행나무 편집장은 "과거의 혼돈과 상처를 현재의 내가 어떤 서사로 완성해 구성할 것인지를 보여준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교보문고가 조사한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젊은 작가가 그려낸 동시대 청춘의 초상도 주목받은 한해였다. 김동휘 난다 편집자는 등단 3년차 신예 작가 김기태의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박선우 한겨레출판 편집자는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을 각각 올해의 책으로 뽑았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아이돌 그룹 팬문화, 일반인 데이트 예능 프로그램 등 요즘 유행하는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소재로 활용했다. <조금 망한 사랑>엔 고달프고 얄궂은 청년 세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절판 20년만에 재출간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차학경의 유작 <딕테> 역시 올해 화제작 중 하나다. 1982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유관순,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그리스 신화 속 뮤즈, 작가 자신 등 다양한 여성의 삶을 소설과 시, 자서전 등 복합적 장르로 교차시키며 풀어나가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10여년 전부터 미국 학계에서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등으로 주목받았다. 국내엔 1997년과 2004년 출간 후 절판됐다가 올해 독자들의 펀딩을 통해 재출간됐다. 박은아 편집자는 "해외 각지에서 쓰인 한인 디아스포라(이주민)의 작품이 전 세계 독자들과 활발히 만나고 있다"며 "세대를 초월하는 예술작품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고전"이라고 평했다. 이 시대에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문학은 어떤 쓸모를 가질 수 있을까. 시인 진은영의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이같은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등 고전에서 문학의 쓸모를 건져 올린다. 서효인 안온북스 편집자는 "문학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믿음을 전파하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그밖에 조해진의 반전소설 <빛과 멜로디>(김성태 김영사 편집자), 프랑스 작가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의 정원>(정기현 민음사 편집자) 등이 추천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세월호 기록, '제2의 한강' 낳을수도시대를 충실하게 기록한 논픽션에서도 주목할만한 작품이 있다. 최윤경 어크로스 편집장은 세월호 사고 10주기를 맞아 피해자 가족 등을 인터뷰하고 관련 기록을 모은 <520번의 금요일>을 올해의 책으로 추천했다. 최 편집장은 "소설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를 집필할 때 5·18 피해자와 유족의 구술 증언집을 참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며 "이 책 역시 세대를 뛰어넘어 전해져야 할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책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를 추천한 최지인 인플루엔셜 래빗홀 팀장은 "전쟁과 포로, 제국과 식민, 가해자와 피해자 등 단순한 프레임을 벗어나 역사의 격랑 속 전복을 반복하는 힘의 지형을 바라 보는 책"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투자의 전설' '워런 버핏의 영원한 파트너' 찰리 멍거의 글과 강연을 엮은 <가난한 찰리의 연감>도 올해의 책으로 추천을 받았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은 "내 생각대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 투자란 행위는 투자자를 철학자로 만든다"며 "서학개미의 필독서"라고 말했다.

시네필(영화애호가)이라면 <영화도둑일기>를 찾아 읽어도 좋겠다. 이재현 문학동네 편집자는 "정식 루트로 구할 수 없는 영화를 수집하는 과정이 낱낱이 새겨진 책"이라고 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아르떼 '탐나는 책' 필진이 선정한 '2024년 올해의 책' 추천사>>>

▶정기현 민음사 편집자 추천: <이아생트의 정원>(앙리 보스코)
모든 것이 느린 마을, 그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 '보리솔'에 사는 노부부가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시기가 되면 방문이 어려울 만큼 외따로 떨어진 곳. 노부부의 집은 "행복이란 게 고작 물 한 줄기에 매달려 있는 세계" 즉, "참 연약한 세계"다. 연약한 세계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견딜 줄 아는 힘이 유달리 강하다. 동물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산을 오르는 양치기 '아르나비엘'의 안부를 그가 피워 낸 불과 연기로부터 짐작하고, 보리솔의 노부부에게 버려진 뒤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소녀의 마음을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들여다본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산과 산, 나무와 나무, 풀과 풀 사이에서 기다림의 자세로 상대를, 환경을, 세계의 모든 기미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곁에 머물 수가 있었다. 그들 곁에 머무는 동안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누군가 급할 것이 전혀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


▶김성태 김영사 편집자 추천: <빛과 멜로디>(조해진)
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는 비참한 울음을 껴안는 반전소설이다. 전쟁 속에서 스러지는 타자의 손을 잡고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기적을 포착한다.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폭력 속에서 연대의 멜로디를 잃지 말자고 쓴다. 서로의 부드러운 온기가 모인 그곳이 안식처라는 걸 상기시키는 책이다.


▶최지인 인플루엔셜 래빗홀 팀장 추천: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조형근)
전쟁과 포로, 제국과 식민, 가해자와 피해자… 단순한 프레임을 벗어나 역사의 격랑 속 전복을 반복하는 힘의 지형을 바라본다.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 가부장제의 중첩된 폭력에도 각자 자신의 최선을 찾아 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역사를 인지하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에 밑줄을 그었다.


▶이재현 문학동네 편집자 추천: <영화도둑일기>(한민수)
OTT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속절없이 떠나보낸 적 있다면, 영어 자막이라도 아니 자막 없이라도 보겠다고 구글링해본 적 있다면, 영상자료원에 방문하거나 해외 직구로 블루레이를 구입해 어렵게 영화를 품에 담은 적 있다면, 정식 루트로 구할 수 없는 영화를 수집하는 과정이 낱낱이 새겨진 이 책을 눈물어린 웃음 없이 읽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귀한 절판본을 찾아다니는, 몇 년째 실현되지 않는 출간 예고를 쥐고 매일 ‘오늘의 신간’을 들락날락거리는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의 저자를 동지로 여긴다. 같은 고뇌를 겪는 동지의 소중한 작업일지이자 앞서 험지를 탐험해본 선구자가 땀으로 적어내려간 경전.


▶서효인 안온북스 편집자 추천: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진은영)
뜻밖의 거대하고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책을 둘러싼 환경은 악화일로이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책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기가 점점 곤란해진다. 그때 이 책을 읽었다. 맞지, 우리는 어차피 세계와 맞지 않았지. 그렇지만 세계에 속한 채 세계에 맞서며 세계를 끌어안고 살아왔지. 이런 믿음을 전파하는 책이다. 문학에 대한 믿음을, 삶에 대한 믿음을.


▶최윤경 어크로스 편집장 추천: <520번의 금요일>(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던 2024년이어서, 세월호참사 10주기였다는 사실이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 책을 올해의책으로 꼽은 이유는 스스로에게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책을 펴낸 온다프레스 박대우 대표는 출간 후 한 인터뷰에서 "부모님들과 기록단에 색이 바래지 않는 좋은 책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게 제가 드리는 존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억도 바래지 않았으면 하는 의미로 이 책을 골랐습니다.

동시에 기록의 의미, 기록의 무게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소설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를 집필할 때 5.18 피해자와 유족의 구술 증언집을 참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세대를 뛰어넘어 전해져야 할 기록임이 분명하기에 올해의책으로 꼽습니다.


▶김동휘 난다 편집자 추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김기태)
한국문학의 미래 그리고 다음을 묻기 좋은 때다. 전에 없던 오늘을 만난 우리니까, ‘오늘’을 쓰는 이를 눈여겨 보면 좋겠다. 김기태처럼.


▶박선우 한겨레출판 편집자 추천: <조금 망한 사랑>(김지연>
세밀하고도 과감한 필치로 써 내려간 매력적인 소설집. 청년 세대의 고달픔을 넘어 생의 얄궂음과 미지를 기민하게 포착해낸다.


▶박은아 편집자 추천: <딕테>(차학경)
기다리는 이가 있는 한, 만남은 언제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올해 이 책이 알려주었다. 지난 몇 년간 많은 독자가 <딕테>의 재출간을 기다려왔다. 한국문학이 번역되어 전 세계인에게 가닿게 된 이때, 해외 각지에서 쓰인 한인 디아스포라의 작품들 또한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인의 독자를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페미니즘문학이자 탈식민주의문학으로 일컬어지는 <딕테>는 오늘의 독자에 의해 되살아나 세대를 초월하는 역사의 위력과 예술작품의 생명력, 독자의 역동을 보여준다. 한국문학의 지평이 다시 헤아려지는 시기에 재등장한 이 책과 저자가, 우리 독자에게도 고전이 되어 끝없는 감상과 해석을 누리길 기대한다.


▶백다흠 은행나무 편집장 추천: <이중 하나는 거짓말>(김애란)
과거의 혼돈과 상처를 현재의 내가 어떤 이야기로, 서사로 완성하여 구성할 것인가. 성장이란, 내 인생의 어느 한 챕터 마지막 문장을 쓰는 일. 소설의 정중하고 교양적인 오래된 그 물음에 김애란이 13년 만에 답했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 추천: <가난한 찰리의 연감>(찰리 멍거)
미국에서는 20년 전 출간된 책인데 저작권 문제로 한국에선 올해 출간된 것으로 안다. 워런 버핏의 친구이며 철학자이자 투자자인 찰리 멍거는 작년 말 세상을 떠났다. 부침이 심한, 내 생각대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 투자란 행위는 투자자를 철학자로 만든다. 벌써부터 서학개미의 필독서가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