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과 한국영화에 '문학의 숨' 불어넣은 송길한 작가 별세

한국 영화 시나리오의 거장
송길한 작가 향년 84세로 별세
송길한 작가를 실제로 본 것은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송길한 마스터클래스’를 통해서였던 것 같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가 오랜 시간 일했던 (부 집행위원장, 고문)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할 때면 그가 남긴 크고 작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영화인들의 모임 곳곳을 가득 채웠더랬다. 김지미 배우의 ‘가방 모찌’를 자처하며 깍듯이 모셨다는 이야기, 왕년의 ‘주당’이었던 임권택 감독보다 술을 더 잘 드신다는 이야기 등…. 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사진출처.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
그럼에도 나에게 송길한 작가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천재적인 인물로 각인된 존재였다. 그는 문예영화가 판을 치던 시대에서도 본인만의 이야기와 인물로 채워진 작품들을 집필했고 정치와 역사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했던 정권에서도 한국사와 그 안에 존재했던 인물들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사실상 그의 이러한 경향은 임권택 감독을 만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송길한 작가는 감독 이상언과 공동으로 집필한 <흑조>로 1973년에 데뷔했다. 4차 영화법 개정과 함께 더욱더 검열이 강화되는 시점에 만들어진 <흑조>는 1970년대 영화들에서 흔치 않게 볼 수 있는 시의성도, 작품성도 결여한 그저 그런 멜로 영화였다. 이후로도 그는 <여고 얄개> 나 <낯선 곳에서 하룻밤> 등과 같은 통속물의 각본가로 참여하며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의 이러한 ‘밋밋한’ 커리어는 1980년 임권택 감독의 <짝코>를 쓰게 되면서 일대 변혁을 맞는다.

임권택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 있는 <짝코>는 지리산 토벌 당시에 놓친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 와 그를 30년에 걸쳐 추격하는 ‘송기열’ (최윤석) 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전쟁 중에 빨치산 대장인 '짝코'를 경찰본부로 호송하던 중 놓쳐버린 경사, 송기열은 공비를 고의로 풀어주었다는 누명을 쓰고 해고된다. 그는 빨갱이와 한패였다는 자신의 오명을 씻기 위해 '짝코'를 찾아 평생 전국을 헤맨다. 이 때문에 그는 가족과 재산마저 모두 잃은 채 걸인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짝코 역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평생을 도망자의 신세로 살며 서서히 파멸되어 간다.

이들은 결국 어느 갱생원에서 서로를 조우하지만 30여 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둘 다 늙은 부랑자일 뿐이다. 짝코를 어떻게든 고향으로 데려가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송기열의 강요에 못 이겨 짝코는 그와 함께 갱생원을 탈출하기로 한다. 천신만고 끝에 그들은 탈출하여 기차를 타지만, 이미 당뇨 합병증으로 죽어가고 있던 짝코는 기차 안에서 죽고, 송 경사는 실성한다.
영화 '짝코' 스틸컷 / 사진. ⓒKMDb
송길한 작가가 쓴 <짝코>는 작가 송길한에게도, 감독 임권택에게도 거대한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이다. 독재 정권에서 기획했던 국책영화와 새마을영화 등으로 커리어를 이어 오던 임권택에게 분단의 비극을 휴먼 드라마로 치환한 이 작품, <짝코>는 그의 작가주의를 실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프로젝트였다. 송길한 작가의 작품으로도 <짝코>는 지난날 그가 매진했던 통속극과 치정 멜로 영화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생 역작이자 걸작이었다.

그는 <짝코>를 집필할 당시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체제 앞에서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에 대해서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증언처럼 <짝코>는 국가 폭력과 이데올로기에 침몰한 인간의 참상을 그리는 동시에 그 안에서의 역설적인 연대를 그린 작품이었다.
사진. ⓒ한경DB
<짝코> 이후로 송길한/임권택 듀오는 <만다라> (<만다라>는 김성동의 원작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상당 부분이 송길한 작가에 의해 각색되었다), <길소뜸>, <티켓> 등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수작을 함께 빚어냈다. 물론 이러한 영예의 저변에는 작가 송길한의 문학적인 ‘숨’이 있었다.지난 12월 22일, 84년의 인생을 뒤로 하고 송길한 작가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지만, 그가 독재와 검열로 질식해 가던 한국 영화에 불어 넣은 숨, 문예 영화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 영화를 영화 문학으로 재탄생하게 한 이야기의 ‘숨’은 세기를 거듭해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송길한(맨 오른쪽) / 사진. ⓒKMDb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