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가스 신냉전, 러시아 가스관 추진했던 한국 '아찔' [원자재 이슈탐구]

우크라이나, 전쟁 3년만에 러시아 가스 끊는다
미국 압력에 유럽 러시아산 LNG수입 쉽지 않을 전망
벤처글로벌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개스로그사바나호 / 사진=DTEK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통해 유럽으로 공급되던 천연가스가 내년부터 끊긴다.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러시아 파이프라인 가스의 운송을 허용하는 5년 계약은 올해 말 만료된다. 유럽은 거미줄처럼 격자로 연결된 파이프라인으로 각 지역에 가스를 공급한다. 그동안 노르웨이 북해 가스전과 러시아 양쪽에서 천연가스를 관에 주입했으나, 앞으로는 우크라이나를 통한 러시아 가스는 끊어지고, 미국과 중동에서 수입한 액화천연가스(LNG)가 항만 터미널에서 기화돼 가스관에 주입될 예정이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28일 처음으로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를 처음으로 수입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의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통과시켜줬고, 국내 공급용으로도 수입해왔으나, 내년부터 이를 중단한다.

우크라이나, 첫 미국산 LNG수입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X(옛 트위터)를 통해 이 같은 소식을 전하며 "이는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전략적 조치"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글로벌 파트너들과 함께 러시아의 협박으로부터 에너지 시스템을 해방하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최대 민간 에너지 기업 데테에카(DTEK)는 그리스 LNG 터미널에서 미국 에너지 기업 벤처글로벌의 '가스로그 사바나'호에 실린 1억㎥에 달하는 LNG를 넘겨받았다. 미국산 천연가스는 루이지에나의 LNG터미널에서 액화돼 대서양을 건너왔다.

DTEK와 벤처글로벌은 우선 2026년 말까지 공급계약을 맺었다. 막심 팀첸코 DTEK 최고경영자(CEO)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미국산 LNG는 지역에 유연하고 안전한 전력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영향력을 걷어내고 있다"고 말했다.다만 튀르키예 가스관을 통해 들어오는 러시아 가스를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세르비아 등이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산 LNG를 수입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도 많다. 이들은 내년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등 위협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천연가스 파이프 / 사진=게티이미지

천연가스로 나뉘는 신냉전 진영

천연가스를 어디서 수입하느냐에 따라 신냉전의 진영이 뚜렷하게 갈릴 전망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하자마자 그동안 야금야금 러시아 LNG를 수입한 유럽 국가에 압력을 행사할 태세다. 미국의 신규 LNG터미널도 줄줄이 완공될 예정이며, 물량을 쏟아놓을 것으로 예상된다.중국을 비롯해 옛 소련 위성국 벨라루스 등 옛 공산 진영은 러시아 가스를 수입하는 반면, 미국의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 등은 미국 LNG 수입을 대거 늘릴 전망이다. 한국 일본 등도 지금처럼 계속 미국 LNG를 수입할 것이 분명하다. 이 구도는 1980년대 이전 냉전 시절과 같다.

예전과 달리 옛 공산 진영 동유럽은 러시아 가스와 결별할 전망이다. 이미 폴란드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러시아 가스 수입이 중단됐다. 서방의 경제 제재가 내려진 후 러시아의 루블화 대금 결제를 폴란드가 거부하자 가스가 끊겼다. 폴란드는 매달리지 않고 차근차근 러시아와 결별했다. 노르웨이산 천연가스를 덴마크를 거쳐 폴란드까지 수송하는 '발틱 파이프라인'을 2022년 10월 개통시키고 LNG수입도 늘린 덕분이다. 그러자 중국 선박이 발틱 파이프라인을 훼손하기도 했다. 2023년 10월 홍콩 국적 컨테이너선 '뉴폴라베어'호는 닻을 내리고 해저 시설이 있는 곳을 가로지르는 수법으로 가스라인과 통신용 광케이블 등을 파손했다. 중국 정부는 '강력한 폭풍' 핑계를 댔으나, 최근 러시아 선박이 똑같은 수법으로 핀란드 해저 전력케이블을 파손시키며 고의적 테러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독일 등 일부 국가들은 러시아 가스에 의존했다가 큰 곤란을 겪었다. 독일은 가스가 끊긴 2022년 가정용 전기요금이 연평균 240유로(약 37만원)/㎿h로 전년에 두배로 뛰었다. 참고로 한국 가정용 전기는 누진제 최하 구간이 약 10만원/㎿h 정도(월 400kWh 초과 부분은 30만원/㎿h 내외)이다. 독일은 현재 네덜란드(30%)나 노르웨이(35%)를 통해 대부분 가스를 수입하고 있다. 2022년 이후 부랴부랴 LNG수입 터미널을 짓기 시작했고 앞으로 LNG수입을 대폭 늘릴 예정이다.
러시아 가스관에 연결된 독일 바트 라우흐슈타트에 있는 가스 트레이딩 기업 VNG의 가스 저장 시설 / 사진=로이터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 사업 추진했던 한국

한국은 독일보다 더 나쁜 상황에 몰릴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나자 1990년대 초반 노태우 정권 때부터 북한을 통해 러시아산 가스를 수입하는 파이프라인을
2011년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러시아 가스관 예상도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러시아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김영삼·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 사업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사업이 이뤄졌으면 값싼 천연가스로 많은 혜택을 얻었을 지 모른다.

러시아와 한국 사이에 있는 북한이 항상 문제였다. 이명박 정권도 이 사업 추진에 나섰고,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대화를 이어간 끝에 2011년 북한이 가스관 통과를 허용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해 김정일이 사망하며 사업은 무산됐다.

이후엔 다시 서방과 러시아·중국 간의 냉전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침공해 강제 병합했고, 중국은 시진핑 독재 체재를 굳히고 칼을 드러냈다. 그런데 지난 정부에선 무슨 이유에선지 러시아 가스 사업을 다시 꺼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특사로 송영길 전 의원을 러시아에 파견해 가스관 및 철도 연결 프로젝트를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문 전 대통령은 2018년 6월엔 러시아를 국빈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러 3각 협력을 위한 가스 분야 한·러 공동연구'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한국가스공사와 러시아 가스프롬의 실무협상도 추진했다. 당시 로이터통신은 한국 내 전문가들을 인용해 "한국이 북한에 운송료로만 연간 약 1억~1억5000만달러를 지급할 것으로 보이며 대북 제재 위반 소지가 크다"며 "북한에 가스 공급을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도 너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또 "유럽의 예를 볼 때 러시아가 가스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고 경고했다.다행이 같은해 북한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담판이 틀어지면서 남북 관계가 경색됐다. 이듬해 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이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극언을 하는 등 논의를 차단해준 덕에 러시아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