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CEO에게 피터 드러커가 건네는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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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흥망 좌우하는 건 CEO의 역량“이 책을 더 일찍 만났다면, 그 책에 담긴 조언대로 실행했다면, 회사의 미래가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격변의 시기 헤쳐갈 도전 리더십 절실
오상헌 산업부장
올해 퇴임한 굴지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얼마 전에 찾은 ‘인생 책’이라며 뜻밖의 이름을 댔다. 피터 드러커의 <경영의 실제>다. 제아무리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가 쓴 책이라지만 70년 전에 나온 책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니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574쪽짜리 책을 펼쳤다. ‘경영학의 교과서’란 별칭 그대로 목표관리, 동기부여, 조직문화에 이르기까지 기업 경영 담론이 빼곡히 담겼다. 드러커는 많은 부분을 경영자의 역할과 책임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경영자는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생명력의 원천”, “경영자의 자질과 능력이 조직의 생존을 결정한다”며 시어스를 사례로 들었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50년 넘게 미국 유통업계 넘버원 자리를 지킨 ‘혁신의 아이콘’이자 잇따른 헛발질로 2018년 파산한 ‘실패의 대명사’로 통하는 그 회사 맞다.
1893년 문을 연 시어스는 출발부터 남달랐다. 누구도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은 농부를 타깃으로 삼은 것부터 그랬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광활한 땅에 흩어져 사는 농부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줄리어스 로젠월드 CEO는 오히려 이걸 사업 기회로 봤다. 농부들이 원하는 상품을 싸고 빠르게 배달하면 큰 시장을 손에 쥘 수 있다고 본 것. 세계 첫 우편주문·판매 시스템은 이렇게 탄생했다. 여기에 그 유명한 “불만족 시 무조건 환불” 정책이 더해지자 우편주문 카탈로그는 미국 농민 사이에서 성경 다음 많이 보는 책이 됐다.
로버트 우드가 CEO를 맡은 1920년대 중반 미국 사회는 또 다른 세상이 됐다. 농부들에게 자가용이란 발이 생겼기 때문이다. 변화를 감지한 우드는 미국 전역에 쇼핑센터를 짓기 시작했고, 30년 뒤 시어스는 700여 개 매장을 보유한 미국 최대 유통업체가 됐다.로젠월드와 우드가 성공한 CEO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①늘 예민하게 트렌드 변화를 관찰했고 ②바뀌어야 할 때 우물쭈물하지 않았고 ③각각의 미션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 임무를 맡겼다. 드러커가 말한 ‘조직을 살리는 CEO’의 전형이다.
책에는 없지만 이렇게 잘나가던 시어스에 망조가 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대형 할인마트란 신(新)업태를 들고나온 월마트가 세력을 키우고, 듣도 보도 못한 온라인 유통으로 아마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도 시어스 경영진은 못 본 척했다. 그 시절 시어스 CEO들에겐 예민한 관찰력도, 빠른 실행력도, 유능한 직원도 없었던 모양이다. “거대한 관료조직이 된 시어스는 변화에 대응하는 대신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에만 집중했다”(미국 경제지 포천)는 평가대로였다.
하루 뒤면 2025년이다. 기업마다 “새해엔 현상 유지도 힘들 것”이라며 아우성이다. 탄핵 사태와 ‘트럼프 2.0 시대’ 개막, 고환율, 내수 침체, 중국의 추격 등 모든 여건이 위기를 가리키고 있어서다. 우리 기업들이 로젠월드와 우드가 이끌던 ‘혁신의 시어스’처럼 성장할지, 뭘 해도 실패한 ‘관료조직이 된 시어스’로 추락할지는 CEO를 중심으로 다가올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터다.
드러커는 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격변과 위협의 시기에는 ‘모두가 아는 어제의 확실성’이란 유혹을 뿌리치고 ‘미래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실행 매니지먼트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새해를 맞는 대한민국 CEO들에게 드러커가 건네는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