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최초본과 초판본의 진실

[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윤동주 유고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정음사 / 1948년 01월 30일 발행
처음에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라고 해서 구입한 책의 표지가 나중에 초판본이라고 소개된 책의 표지와 달라서 순간 덜컹했던 적이 있다. 잘못 산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표지 사진을 보면 하나는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갈색 바탕에 시집 제목과 시인 이름이 인쇄된 별도의 흰 종이를 붙여 놓은 것인 반면에, 또 하나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판화 그림과 글씨가 새겨진 것이라서 어떤 것이 진짜 초판본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표지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인 데다 같은 날짜에 나온 시집이라니…….
[좌] 윤동주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최초본 표지 [우] 초판본 표지 / 사진. ⓒ김기태
그런데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하고 금세 풀렸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가진 것이 초판본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앞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니 놀라웠다.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최초본 있었다

고 최영해 정음사 대표 아들 첫 공개
“1948년 3주기 추도식때 10권 헌정… 한달뒤 정식 초판본 1000부 제작”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본이 27일 공개됐다. 최초본은 1948년 2월 16일 윤 시인의 3주기 추도식에 헌정하기 위해 급히 낸 것이다.
당시 시집은 외솔 최현배 선생의 아들인 최영해 정음사 대표(1914∼1981)가 펴냈다. 최 대표의 장남 최동식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71)는 이날 “윤 시인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시집을 출간하려 했으나 준비가 부족해 일단 동대문에서 구한 벽지로 겉표지를 만들어 시집 10권을 급히 제본했다고 부친에게 들었다”며 “최초본 10권은 추도식 참석자들이 나눠 가졌고 정식 출판된 초판본은 한 달 정도 뒤에 나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초본은 1000부 가량 제작된 초판본과 표지만 다를 뿐 본문은 똑같다. 최 교수는 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보관해온 시집을 공개했다.
- 박훈상 기자 [동아일보(업데이트 2014년 10월 28일 07시 56분)]


위의 기사와 함께 공개된 것이 바로 갈색 바탕의 표지로 만들어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당시 10부가 만들어졌으니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더 적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갈색 표지의 윤동주 유고시집은 매우 귀한 책, 즉 극희귀본(極稀貴本)이라는 말이 된다. 그중 1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정말 묘했다. (여기서는 편의상 위 기사를 참조하여 갈색 표지 시집은 ‘최초본’으로, 판화 표지 시집은 ‘초판본’으로 적음. 이하 내용은 윤동주 관련해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필자가 재구성함.)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김소월(金素月, 1902~1934)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시인이다. 고단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문학을 통해 흔들림 없이 시대와 삶의 방향성을 모색하면서, 현실을 고민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로써 한글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로 인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어 온갖 고초를 겪다가 스물일곱 젊디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시편들은 오롯이 남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지향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윤동주 졸업사진(1941) / 사진출처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그동안 이러저러한 발굴 과정을 거쳐 확인된 윤동주의 시와 산문 124편은 우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동아시아인이 기억하고, 세계인이 공감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는 '서시(序詩)'를 비롯한 일련의 시작품을 통해 맑고 순수한 영혼이 우리 곁에 살다 갔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신념의 길을 걷고자 했던 동주의 시는 이후에도 시대의 고비마다 청년들을 발전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모친 김용(金龍, 1891~1948) 슬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9세기 말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했는데, 당시 북간도의 대표적인 한인 주거지였던 명동촌(明洞村)이 그가 태어난 곳이었다. 민족교육. 독립운동, 기독교 신앙생활을 지향하는 한인 공동체의 터전이었던 고향 마을에서 동주는 자연스럽게 한글과 한학(漢學)을 익히고 신앙심을 기르며 자라났다.

윤동주 일가는 1932년 용정(龍井)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만 열네 살에 송몽규(宋夢奎, 1917~1945),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등과 함께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동기들과 교내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 뛰었는가 하면, 교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달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 윤동주 / 사진출처. 위키백과
그러던 중 1934년 12월 24일 성탄절을 기다리며 다음과 같은 '초 한대'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같은 시를 쓰게 되는데, 이것이 곧 윤동주의 최초 작품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때부터 작품과 창작 날짜를 적은 시편을 창작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소년 윤동주는 정지용(鄭芝溶, 1902~1950), 백석(白石, 1912~1996)을 비롯한 여러 시인의 문학작품을 탐독하는 한편,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작품과 평론을 스크랩하면서 시 창작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윤동주는 습작기부터 알아보기 쉬운 시어(詩語)로 시를 쓰는 창작 방법을 모색했다. 이 시기 윤동주는 주로 고향마을의 자연과 주변 환경을 서정적이며 간결한 시어로 노래했다. 그리하여 바람, 나무, 길, 별 등 그의 주요한 시적 모티브들이 등장하게 된다.

1937년 3월에는 <카톨릭소년>에 동시 '무얼 먹고 사나'를 발표한다. 실제로는(습작 노트에 따르면) 1936년 10월에 쓴 이 동시 전문(全文)을 보면

“바닷가 사람/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에 사람/감자 구워 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무얼 먹고 사나”

라고 노래함으로써 별나라에 대한 순수한 동심을 담고 있다.

하지만 윤동주의 소년기는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 식민 통치 강화 등 암담한 현실 속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습작시에는 시대와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예컨대, 아우를 등장시킨 작품을 보면 이 같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윤동주에게는 바로 아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1924~2011)과 남동생 윤일주(尹一柱, 1927~1985) 윤광주(尹光柱, 1933~1962)가 있었다.

'아우의 인상화'라는 작품을 보면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사람이 되지’/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아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라고 읊음으로써 험난한 식민지 시기를 살아가야 할 천진한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형의 착잡한 심경이 잘 담겨 있다.

시 '아우의 인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윤동주의 습작 노트에는 명랑한 동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현실과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성장하는 소년의 내적 갈등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남쪽하늘'이나 '고향집' 같은 작품을 보면 두만강 남쪽에 있는 조국을 정신적 고향으로 삼았던 윤동주의 애달픈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북간도에서 자란 윤동주에게 ‘남쪽’은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을까. 그가 줄곧 남쪽 하늘 아래 사는 동포들의 언어인 한글로 시를 썼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1938년 4월, 윤동주는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있는 경성 연희전문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무엇을 위해 고향 용정으로부터 경성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선택한 것일까. 윤동주는 원래 우리말과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많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교육정책 속에서 올바른 지식과 문화를 온전히 배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윤동주는 이런 상황 속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으로 잘 알려진 연희전문학교에서 자신이 꿈꾸었던 문학과 학문을 본격적으로 일구고자 했을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언더우드관(1939) / 사진출처. 위키백과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기숙사 ‘핀슨관’에서 생활했다. 고향에서 함께 진학한 사촌 송몽규와 새로 사귄 강처중이 그의 룸메이트였다. 나아가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청년 윤동주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강처중(姜處重, 1917~?), 김삼불(金三不, 1920~?), 유영(柳玲, 1917~2002), 장덕순(張德順, 1921~1996), 정병욱(鄭炳昱, 1922~1982) 등은 윤동주의 짧은 생애 중 가장 빛나는 시기였던 청년기에 관한 기억을 오늘에 전해준 고귀한 사람들이다.

이 시기 마침내 시심(詩心)을 나눌 동료들을 만난 동주는 그해에 '새로운 길'을 비롯한 열세 편의 시, 그리고 여러 편의 산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펼치는 한편, 그는 전국에서 온 다양한 배경의 청년들과 교류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회현실과 부딪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울러 이 시기 동주는 자신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며 삶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또한, 연희전문에 재학하는 동안 만난 스승들 덕분에 윤동주의 작품세계는 더욱 깊고 풍부해졌다. 그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선생을 통해 체계적인 한글을 깨우치는 한편, 이양하(李敭河, 1904~1963) 선생에게서는 영문학을, 손진태(孫晉泰, 1900~?) 선생에게서는 민족과 세계역사를 배우게 된다. 그는 정인섭 선생으로부터 세계문학을 배우며 과제로 쓴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배운 것을 즉시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는 동주의 모습에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에게 강의실과 캠퍼스는 시창작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한편, 윤동주의 스크랩북과 소장 도서를 보면, 그의 관심 분야는 매우 다양하여 동서양의 고전, 철학, 예술뿐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각종 사상(思想)들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충만했음을 알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프란시스 잠( Francis Jammes, 1868~1938),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등의 작품을 비롯한 세계문학도 탐독했다. 그는 깊이 있는 독서와 토론을 통해 기른 사유(思惟)를 바탕으로 누구에게나 소통 가능한 쉽고 아름다운 시어로 작품을 쓰고자 고민했다.

실제로 윤동주는 1941년 6월 연희전문 문과대학 발행 잡지 <문우(文友)>에 한글 작품 '새로운 길'과 '우물 속의 자상화(自像畵)'를 실었다. 당시 문우회장이었던 강처중이 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고, 문예부장이었던 송몽규가 편집후기를 썼다. 출판 검열로 인해 잡지 전체가 일본어로 출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윤동주와 송몽규, 그리고 김삼불 등 3인은 한글 작품을 실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 잡지는 윤동주 등의 시가 실린 호수를 마지막으로 종간(終刊)되고 만다.
송몽규(가운데)와 윤동주(2열 오른쪽) /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윤동주는 1942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10월까지 리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당시 리쿄대 원고지에 시를 써서 강처중에게 편지로 보냈는데, '쉽게 씌어진 시'를 포함한 5편의 시가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었다.

이 시편들에는 고향과 조선 땅을 떠나 제국의 수도에서 유학하게 된 식민지 청년의 자의식이 그가 거닐었던 이국의 거리와 하숙방을 배경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작품을 보면 그는 당대에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질문하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윤동주는 리쿄대학을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교토(京都)로 옮겨가는데, 그 직전 여름방학에 잠시 고향마을에 들른다. 이때 각지에서 모인 또래 친지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에 그의 인자한 미소가 잘 담겨 있다. 하지만 배와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검문과 검열이 삼엄한 국경을 건너 고향에 도착한 그의 내면은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체제 아래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던 동주는 식민지 말기 민족문화가 말살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한글로 쓴 인쇄물이라면 무엇이든 모으라는 당부를 동생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1942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한다. 그는 당시 교토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사촌 송몽규, 그리고 당숙 윤영춘(尹永春, 1912~1978) 등과 함께 우에노(上野) 공원, 비파호(琵琶湖) 등을 산책하며 국내외 정세와 독서에 관한 담소를 나누었다. 하지만 총력전 시기 일본에서의 상황도 악화되어 조선인에 대한 감시가 삼엄해졌고, 1943년 7월 결국 송몽규와 윤동주도 차례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면서 원고와 소지품 등을 압수당하고 말았다.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교토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2년 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로 이송된다. 윤동주는 가족이 보내준 ‘영일대조 신약성서’와 함께 투옥의 시간을 견디고자 했고, 동생에게 보내는 엽서에는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형무소에서 여러 고초를 겪다가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미처 만나지 못하고 애통하게 옥사(獄死)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못 되어 송몽규도 동주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얼마 뒤, 달마다 반가이 배달되곤 했던 동주의 엽서 대신 가족들은 갑작스런 그의 사망 소식이 담긴 전보를 받게 된다. 부친과 당숙 윤영춘은 황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신속하게 움직여 그의 시신을 수습했고, 그의 유해는 고향마을에 안장되었다.

학사모를 쓴 졸업사진은 끝내 장례식 영정사진이 되고 말았으며, 장례식에서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문과대 잡지 <문우>에 실었던 시 두 편이 낭송되었다. 그해 6월, 윤동주의 묘소에는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진 묘비가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시인 윤동주’로 불리게 되었다.

윤동주 생애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원래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19편을 모아 내려고 했던 시집이다. 윤동주는 자선시집(自選詩集) 형식으로 77부를 출간하려고 했지만, 당시 한글 출판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윤동주는 자필로 시집 3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자신이 보관하고, 스승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각 한 부씩 증정했다. 현재 남아 있는 단 한 부의 윤동주 자필 시집은 후배 정병욱에게 선사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선후배인 윤동주와 정병욱 / 사진. ⓒ한경DB
윤동주의 시집은 시인이 낯선 타국에서 온갖 고초와 외로움 속에서 세상을 버린 후, 해방이 되고 나서도 3년여가 지나서야 겨우 출판될 수 있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윤동주는 작품을 쓸 때마다 창작한 날짜를 적어놓았다. 가장 먼저 쓴 시는 1934년 12월 24일에 지은 것으로 '초 한 대' 등 3편이었고, 처음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 숭실학교 <숭실활천>에 게재된 '공상'이다. 신문에 발표된 것으로는 1939년 1월 23일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린 시 '유언(遺言)'이 처음이었고, 사후에 발표된 최초의 작품은 정지용의 소개로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실린 '쉽게 씌어진 시'였다.

그리고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출간은 추모식에서 비롯되었다. 1947년 2월 16일 서울에서 열린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에 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 뒤 더 모임을 가져, 정병욱이 보관한 유고(遺稿) 19편에 연희전문 동기생 강처중이 보관한 것에서 12편을 골라 모두 31편을 추렸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가족과 지인 들은 그의 유고 31편에 정지용의 서문(序文), 유영의 추모시(追慕詩)와 강처중의 발문(跋文)을 더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했다. 원래 이 시집의 제목을 ‘병원(病院)’으로 붙일 뻔했는데,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의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문을 쓴 정지용은 윤동주의 정신적 스승으로 당시 경향신문 주필(主筆)이었고, 추모시를 쓴 유영은 동주와 연희전문을 함께 다닌 문우(文友)이자 시인이었으며, 발문을 쓴 강처중은 동주의 절친인 동시에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다.
유영의 추모시 / 사진. ⓒ김기태
동생 윤일주가 작품 선별과 편집을 맡았고, 표지 그림 의뢰 때문에 정음사와 인연을 맺은 끝에 나중에 정음사 편집장을 지낸 이정(李靚, 1924~1995, 본명 이주순) 화백이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맡았다. 살아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던 청년 윤동주의 소망은 이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실현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윤동주의 사후에나마 온전한 유고시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원고를 지켜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부만 남아 있는 윤동주의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문학적 동반자이자 이후 고전문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정병욱과 그의 가족들이 일제의 단속과 검열을 피해 전남 광양 고향집에 고이 숨겨 지켜낸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이 원고를 귀하게 여긴 이들이 시집을 출판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마터면 '서시'와 '별 헤는 밤' 등 우리 문학사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들이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니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로 125mm, 세로 185mm 정도 크기의 최초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표지는 딱딱한 재질이지만 일반 양장제책과는 달리 두꺼운 종이를 여러 장 덧댄 합지(合紙)가 아니라 표지 용지로 사용하기에는 거친 재질의 종이, 즉 특수 벽지(壁紙)로 보인다. 이것을 표지 크기로 잘라 한지(韓紙) 계열의 부드러운 면지(面紙)를 붙임으로써 같은 지질(紙質)의 본문과 연결하여 표지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동주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최초본 표지 / 사진. ⓒ김기태
그리고 직접 인쇄하기가 어려웠던 탓에 별도의 얇은 흰색 종이에 3행에 걸쳐 [윤동주 유고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정음사]라는 글씨를 한자로 인쇄하여 상단에 붙여 놓았다. 여기서 시인의 작품 성향과 더불어 출판사 특유의 한글 사랑 정신을 엿볼 수 있거니와, 당시로서는 드물게 가로쓰기를 단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집을 펴낸 정음사가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의 스승이었던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이 설립한 곳이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윤동주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표지 별지 / 사진. ⓒ김기태
표지를 넘기면 면지가 겉표지에 붙어 있고 곧바로 속표지가 나타난다. 겉표지와는 달리 속표지에는 시집 제목이 맨 위에 인쇄되어 있고 그 아래 시인의 이름이 나오고, 그다음으로 영문 제목 ‘the sky and wind and a star’가 새겨져 있으며, 하단에 출판사 이름이 있다.
윤동주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속표지 / 사진. ⓒ김기태
속표지를 넘기면 다음과 같이 “序(서)―랄것이 아니라”로 시작하는 정지용의 서문이 나온다. 윤동주의 인간됨이 고스란하다. 정지용의 서문 다음에 두 쪽에 걸쳐 차례가 나온다. '서시'를 필두로 첫 번째 장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자화상'을 비롯한 18편이, 두 번째 장 ‘흰 그림자’에 5편, 세 번째 장 ‘밤’에 7편이 실려 있다.
윤동주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정지용의 서문 / 사진. ⓒ김기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본 ‘차례’에 나와 있는 31편의 작품 제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안의 한글 이외 모두 원문 그대로 옮김]

● 序詩(서시)
● 自畵像(자화상)
● 少年(소년)
● 눈 오는 地圖(지도)
● 돌아와 보는 밤
● 病院(병원)
● 새로운 길
● 看板(간판) 없는 거리
● 太初(태초)의 아츰
● 또 太初(태초)의 아츰
● 새벽이 올때 까지
● 무서운 時間(시간)
● 十字架((십자가)
● 바람이 불어
● 슬픈 族屬(족속)
● 눈 감고 간다
● 또 다른 故鄕(고향)
● 길
● 별헤는 밤
● 흰 그림자
● 사랑스런 追憶(추억)
● 흐르는 거리
● 쉽게 씨워진 詩(시)
● 봄
● 발
● 遺言(유언)
● 아우의 印像畵(인상화)
● 慰勞(위로)
● 肝(간)
● 산골물
● 懺悔錄(참회록)

그런데 차례 맨 끝에 보면 ‘장정(裝幀)․이정(李靚)’이라는 문구가 있다. 하지만, 이 책 최초본의 표지는 장정으로서의 아무런 디자인이 없다. 이로써 원래 이정 화백이 판화를 바탕으로 장정한 표지의 초판본 이전에 급하게 최초본 10부를 만들었다는 증언이 확인된다고 하겠다. 즉, 본문은 이러저러하게 인쇄할 수 있었는데 표지 용지를 구하지 못해 완전한 초판본을 윤동주 3주기 추도식에 맞추어 펴낼 수 없게 되자 급하게 갈색 벽지를 구해다가 10부 제작한 것이 바로 최초본이었던 것이다.
윤동주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차례 / 사진. ⓒ김기태
차례가 끝나고 나면 시집 제목만 인쇄된 속표지가 한 번 더 나오고, 그 뒤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서시'가 실려 있다. 시의 말미에는 ‘1941년 11월 20일’에 이 시가 쓰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뒤를 이어 1939년 9월에 창작된 '자화상'이 실려 있다. 나머지는 차례의 순서와 같다. 맨 마지막에는 1924년에 창작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 '참회록'이 실려 있고, 그 뒤를 이어 유영 시인의 추모시가 '창밖에 있거든 두다리라―동주 몽규 두 영을 부른다'는 제목을 달고 실려 있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순서로 강처중의 ‘발문’이 나온다.
윤동주 &lt;서시&gt; / 사진. ⓒ김기태
윤동주 &lt;자화상&gt; / 사진. ⓒ김기태
끝으로, 차례에서도 확인했듯이 본문에 이어 나오는 간기면(刊記面)을 보면 최초본 역시 초판본과 다른 것이 없다. 인지(印紙)까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 인쇄작업은 모두 끝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책값은 당시 화폐단위로 ‘100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쇄일은 1948년 1월 20일, 발행일은 1월 30일로 표기되어 있다. 발행처인 정음사의 당시 주소는 ‘서울시 회현동 1가 3-2’로 나타나 있으며, 발행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마도 이 시집을 소장하고 있었던 곳인 듯 간기면 하단에 ‘소피아서점’이라는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소피아서점은 김영태(金榮泰, 1936~2007) 시인이

“충무로에/소피아라는 서점이 있다/무대의 분장을 지우지 않은 듯한/부인이 앉아있다/아무도 이 건물 3층에서 소문도 없이/독일원서만을 취급하고 있는지 모른다/소피아 서점에 가면/향기로운 잎담배 냄새가/벽에 배어있다”

고 읊었던 서점으로, 1957년 충무로(명동)에 문을 열었던 독일원서 전문서점 그곳이 아닐까 싶다. 나중에 충정로 어느 빌딩으로 자리를 옮겼다는데, 현재 서점이 어디 있는지 그 자취는 알 길이 없다.
윤동주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간기면 / 사진. ⓒ김기태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모든 시를 한글로만 쓴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습작 노트에서 자선시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를 한글로 썼다. '서시'만 해도 제목을 제외한 시 작품 전체가 한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반만년 역사의 장엄한 서사시나 다름없는 우리 문화공동체가 외압에 의해 강제로 사라져 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특히 한글로 시를 쓰는 문학적 실천을 통해 일상어 그 이상의 예술 언어로서의 한글을 유지하고 지켜내고자 애썼던,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이었다.

또한, 윤동주는 우리 역사에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서시', '별 헤는 밤' 같은 소명 의식과 신념이 가득 담긴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문학사에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었다. 세상이 병든 시대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병원'을 썼는가 하면, 어둠 속에서 빛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태초의 아침', '팔복' 같은 작품을 통해 신앙적으로 성숙해 가는 자신을 다독였다. '자화상'과 '참회록'에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며 처연한 다짐을 통해 저항의 힘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곤 했다.

나아가 윤동주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랑받는 특별한 시인이다. 그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북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손으로서 정신적 지향점이었던 남쪽 한반도를 고향으로 그리워하며 성장하다가 학업을 위해 점차 남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갔다.

그가 머문 지역은 현재 중국, 한국, 일본에 걸쳐 넓게 분포해 있으며, 그 모든 곳에는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추모제도 여기저기서 해마다 열리고 있다. 한 문학청년의 생애와 고결한 시편들은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시나브로 고통과 전운(戰雲)이 사라진 동아시아의 기억과 화해를 위한 징검다리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강처중의 발문을 다시 읽어본다. 정지용의 서문이 아우 윤일주의 입을 빌려 윤동주를 그리워한 것이라면, 강처중의 발문은 오롯이 서로가 삶을 공유하며 느꼈던 소박한 마음을 담아내고 있어 더욱 애틋하다. 그리고 ‘윤동주’라는 시인을 보유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럽다.
윤동주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강처중의 발문 / 사진. ⓒ김기태
그나저나 내가 갖고 있는 이 책은 최초본일까, 초판본일까?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