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자금조달 기업에 '주홍글씨' 낙인 찍는 금감원

증자 신고서 제동건수 14건 달해
주주가치 훼손 부메랑 우려

최석철 증권부 기자
2024년은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게 어려웠던 한 해였다. 유상증자 등을 활용해 신사업에 진출하려던 기업들은 매번 곤욕을 치렀다. 한국 증시가 부진한 영향도 있었지만 더 큰 원인은 따로 있다. 금융감독원의 전례 없는 시장 개입이다.

기업이 공모로 자금을 조달하려면 금감원에 증권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신고서가 심사를 거쳐 효력이 발생해야 청약 등의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금감원은 투자자 보호를 위해 정정신고서 제출 등을 요구할 수 있다.지난 한 해 금감원의 개입은 유독 많았다. 상장기업 유상증자 제동 건수는 14건에 달했다. 2021년 4건, 2022년 7건, 2023년 8건 등 과거보다 확연히 많다. 특히 2024년 하반기에만 10건에 대한 정정 요구가 집중됐다. 금감원은 유상증자뿐 아니라 기업공개(IPO), 합병 등에도 한층 과감하게 개입했다. 정부가 추진한 밸류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금감원이 주주 소통 등을 강조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금감원이 신고서의 허위 기재나 투자 정보 누락 등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유상증자 등의 적정성을 따지면서 주객이 전도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상증자를 준비 중인 한 상장사 임원은 “신고서상 문제를 넘어 유상증자의 목적, 지배구조, 주주들과의 소통 여부 등을 세세히 검사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이 단순한 정정 요구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도 큰 부담이다. 금감원의 정정 요구가 통상적 절차가 아니라 증자 철회 압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수페타시스도 금감원의 요구로 정정 신고서를 제출했지만, 또다시 정정 요구를 받았다. 시장에서는 금감원이 사실상 증자를 철회하라는 압박을 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상증자를 추진하는 현대차증권과 차바이오텍 등도 금감원 심사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 초긴장 상태다.유상증자는 주가 희석으로 단기적으로 주가에 악재일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새 성장동력을 장착해 호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유상증자에 따른 단기 주가 하락이라는 이유로 자금조달이 이뤄지지 않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 여파로 기업의 성장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오히려 주주가치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

한 증권사 임원은 “금감원이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해당 기업에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기업이라는 ‘주홍글씨’가 먼저 찍히고 있다”며 “명분이 없는 유상증자나 IPO라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외면받기 마련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