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 자기야 그만울어" 문학과 영화가 건네는 작은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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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허무의 감정으로 시작한 2025년지금의 아픔을 너무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곧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 우리 모두 우울증에 걸릴 판이다. 잘 안다.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궁극으로 구원하는 것은 문학과 예술이다. 문화가 내재한 힘만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 이건,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이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영화와 문학 작품들
눈물과 사랑의 카타르시스 '렛 미 인'
대참사 이후를 살아내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삶과 죽음에 대한 헤밍웨이의 성찰 '킬리만자로의 눈'
1960년대 전후 사회에서 생명력을 잉태한 '디데이의 병촌'
부서진 일상을 일으켜 세우다1월 15일 재개봉하는 스웨덴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의 걸작 ‘렛 미 인’은 원래 2008년 개봉 영화다. 17년 전이다. 한국에서는 서울 중구 저동의 중앙시네마에서 상영됐다. 당시의 중앙시네마는 관(2010년) 직전이었던 만큼 낡고 냄새까지 나는 곳이었던데다 등받이도 낮았다. 옛날식 극장이었지만 좋은 영화라면 마다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찾는 그런 극장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앞에 앉은 남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단순히 우는 것이 아니라 뒤에 앉은 내가 알 수 있을 만큼 몸을 흔들며 울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여자가 남자를 안았다. 여자가 말했다. “그만 울어 자기야, 그만 울어.”남자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옆에 앉은 여자가, 영화에서처럼, 알고 보면, 드라큘라여서일까. ‘렛 미 인’은 슬픈 뱀파이어의 이야기이다. 죽지 않는 여자, 어린 모습 그대로의 드라큘라 여자아이를 평생 사랑하며 그녀를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피가 필요하니까) 남자(들) 얘기이다.사랑은 공포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얘기를 품고 있다. 울지마 자기야 이제 그만 울어, 라며 역시 목이 멘 목소리로, 남자의 머리를 안아주던 여자의 뒷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 둘은 잘살고 있을까. 울며 사랑하는 두 연인을 기억할 때마다 세상의 어둠이 걷히는 느낌을 받는다. 눈물과 사랑은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비적대적이자 동지적 관계다.
영화 ‘렛 미 인’은 무서운 영화가 아니다. 잔인한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세상사의 고통과 고뇌를 잊게 해준다. 힐링이라는 건 한참을 울고 난 후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역시 스웨덴 작가인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가 썼다. 영화든 책이든, 이 작품은 부서진 일상에서 당신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죽음과 사랑은 이음동의어<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작품은 산드라 블록이 나왔던 영화(무려 스티븐 달드리가 감독을 한)보다 조너던 샤프란 포어가 쓴 소설이 훨씬 눈물이 난다. 9·11 참사 희생자들의 마음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갈가리 찢겨져 나가 있어서 일상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하고 평온하곤 했다.
그러나 그 내면의 폭풍은 거의 퍼펙트 스톰 급이어서 자칫 조금만 건드려도 물풍선의 물만큼 눈물이 터져 나온다. 엄마 린다는 남편이 떠난 후 아무런 의욕도, 더 이상의 분노나 슬픔도 느끼지 않으며 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다 아들 오스카의 이런저런 이상한 행동에 정신을 차린다. 그녀는 다시 살아 내고자 한다. 그건 표면적으로 아들을 위해서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죽은 남편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 결심 아닌 결심은 내면적으로는 ‘엄청나게 시끄러운’ 의지다.죽은 남편은 아들인 오스카만큼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곳에 늘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사랑은 이음동의어이다. 소설은 2006년에 쓰였고 영화는 2011년에 개봉됐다. 소설은 시기가 적당했지만, 영화는 아직 너무 빨랐다. 대규모 참사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건 20년쯤이 다 돼야 좋다. 그 정도 돼야 거리를 두고 바라 볼 수 있게 된다.우리 안에 신이 있다면
고약한 성격의 노친네인 오토는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온 사방에서 독설을 일삼는다. 그가 그러는 데는 자신 스스로가 잘 안 죽어져서이다. 그는 아내 소냐가 죽은 후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지만 목줄이 끊어진다든지, 기차역에서는 누가 뒤에서 잡다 당긴다든지 등등 자살이 영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이 뒤숭숭하고 배배 꼬여 있다. 어쩌면 내심으론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마음을 들켜서이기 때문이기도하다. 하긴 그가 그럴 때마다 아내 소냐가 애지중지 키웠던 고양이가 그를 바라보곤 한다.그런 오토에게 말콤이라는 배달부 남자아이는 눈엣가시다. 오토는 항상 그에게 소리를 치고 윽박지른다. 말콤은 사용한 자전거를 아무 데나 세워 놓는 버릇이 있다. 자신에게 아무리 야단법석을 핀다 한들 청년 말콤은 노인 오토에게 늘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군다. 말콤은 어느 날 한결같이 ‘지랄을 떠는’ 오토에게 말한다.
“소냐 선생님 때문에 선생님도 알고 있었어요.” 오토의 얼굴이 웬열, 하는 표정이 된다. 말콤의 말이 이어진다. “소냐 선생님은 제게 처음으로 아이들 앞에서 저의 여자 이름을 불러 주신 분이죠. 저도 선생님만큼 그분을 잊지 못해요.”말콤은 트랜스젠더 성향의 게이이다. 학교에서 늘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오토의 아내 소냐는 따뜻한 선생님이었고 인간의 평등한 가치를 잘 알고 실천한 여성이었다. 오토는 말콤을 통해 죽은 아내가 부활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것이다. 사람들에겐 저마다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며 예수의 의지가 구현되고 있다.
영화 ‘오토라는 남자’는 2022년에 개봉됐다. 원작은 스웨덴 작가(왜 이렇게 스웨덴 작가가 많은지 원) 프레드릭 베크만이 썼다. 원작의 제목은 <오베라는 남자>이다. 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눈물 나게 한다. 순전히 톰 행크스의 연기 덕이다. 그의 공이 큰 작품이다.
헤밍웨이가 정면으로 마주한 ‘죽음’고즈넉한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면 헤밍웨이가 1936년에 썼지만 61년 단편집으로 출간된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것 만한 일도 없다. 물론 이 작품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헨리 킹이라는 전설의 감독이 그레고리 펙과 에바 가드너, 수잔 헤이워드 등 당대 톱스타만을 데리고 찍었다. 1952년 영화다. 이 작품은 영화를 찾기가 힘들다. 소설은 2023년에도 재출간됐다. 그러니 소설을 찾는 게 더 쉽다. 게다가 영화보다는 소설이 낫다. ‘쬐금’이라도 더 낫다. 죽어가는 한 남자의 그 가능한 한 ‘평평해지고 펑퍼짐해지려는 마음’이 보다 더 잘 읽히기 때문이다.
주인공 해리는 아프리카에서 사파리 사냥 중에 다리를 다친다. 상남자답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상처는 썩어들어 간다. 패혈증의 증세가 들이닥친다. 해리는 사경을 헤맨다. 그의 눈앞에는 킬리만자로의 봉우리가 들어 온다. 그는 줄곧 환영을 본다. 사랑했지만 죽은 연인 신시아(에바 가드너)가 찾아온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무릎에 얹혀 놓은 채 그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리는 신시아가 죽었으며 신시아를 닮은 또 다른 여자 헬렌과 결혼했었다는 걸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신시아가 더 담겨 있다. 죽어 가는 남자는 늘 그렇듯 반성과 회한이라는 성찰의 태도를 보인다. 영화에서 그레고리 펙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헤밍웨이의 뚝뚝 끊어 내는 듯한 간결하고 치명적인 단문의 말투를 그 느낌 그대로 전달해 내지는 못한다. 그건 오로지 헤밍웨이만의 재능이자 하늘이 준 특혜이다. 아마도 헤밍웨이는 일찌감치 죽음을 생각했고 죽음을 준비했던 듯싶다.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새삼스레 우리 주변의 많은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사실은 죽음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 들일 준비가 돼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지금처럼 죽음이 많은 시대라면 죽음을 좀더 정면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그런 면에서 더할 나위없이 좋은 소설이다.허망한 죽음들 속에 잉태하는 생명력
아무도 안 알아주고, 신세대들이라면 결코 알지 못하는 소설이 바로 전설의 작가 홍성원의 <디데이의 병촌>이다. 1960년대 강원도 전방부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정훈장교 중위 현경식이 주인공인데 이런 일 저런 일 다 떠나서 (휴전 이후 10년이 갓 넘은 때여서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묻어나던 때이고 허망한 죽음이 많았던 때이다) 부대 인근 과부촌의 선경이라는 여자와의 독특한 사랑 이야기가 중심인 소설이다.과부촌은 은근히 미군을 상대로 하는 일이 많았던 곳이고 선경은 거기서 잡일을 한다. 현경식과 선경은 결국 잠을 같이 자게 되는데 그때의 대사가 기억난다. 선경은 현경을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이며 말한다. “아임 레디.”
어릴 때 읽었던 소설이고 기억의 교란이 있겠으나 지금 생각해도 이 장면은 도저히 영화로 표현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가 안으려고 했던 것은 남자라기 보다는 새로운 생명이다. 그 잉태의 생명력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 이후의 시대를 견디고 이겨내게 한 것이다. 끈끈한 생명력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선경은 민경현이 아이를 가질 것이다. 그건 우리의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우리를 낳아 기른 것과 같은 행위이다. 홍성원의 <디데이의 병촌>을 읽고 있으면 기이하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우리인가. 지난 70년간의 전쟁과 시대적 갈등을 다 뚫고 온 우리가 아니겠는가.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