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

정치 불안의 '충격' 나라마다 달라
시스템 신뢰 여부가 선진국 '결정'

최상엽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2024년은 한국 경제에 참으로 가혹한 한 해였다. 고령화와 생산성 저하 등에 따른 잠재성장률의 지속적인 하락과 같은 구조적 문제 외에도 정치권에서 시작된 갈등과 불확실성이 경제를 집어삼켰다. 이에 따라 외국인 투자 자금이 이탈하고 금융·외환시장은 연일 출렁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에 따른 정책적 기조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경제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도 만연해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반드시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과거 경험에 비춰볼 때 정치적 불확실성이 반드시 경제 위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 해외 학술지에 게재된 연구에서 미국의 주식 및 채권 투자자들이 투자국의 정치적 불확실성과 리스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봤다. 계엄과 탄핵 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 한국 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의외의 발견은 선진국이라고 해서 비선진국보다 딱히 정치적 불확실성이나 리스크가 낮지 않다는 점이었다. 인상 깊은 국제 정치 뉴스가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떠올려보면 수긍이 간다.예상한 대로 정치적 불확실성은 외국인의 해당국 투자를 감소시켰으나 선진국은 이런 영향이 일시적이고 제한적이었다. 반면, 비선진국에서는 훨씬 더 크고 지속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차이를 가져오는 선진국과 비선진국 집단의 특성은 무엇이었을까. 금융시장의 유동성이나 환율 제도, 자본시장 개방도 같은 시장 여건과 경제 상황의 차이가 아니라 법과 제도의 안정성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

즉, 선진국 경제가 정치적 문제에 잡아먹히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정치적 수준이 딱히 높아서나 잘사는 나라여서가 아니었다. 바로 시스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선진국과 비선진국을 구분하는 차이도 경제의 외형적 성장이 아니라 바로 시스템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정치와 경제 상황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필자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근무하던 2016년은 정치적 양극화와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때였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의 증대가 미국 경제를 위기로 이끌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실제로 트럼프 1기 행정부 이후 미국 사회에선 정치적 갈등과 양극화가 계속됐다. 그런데도 미국 경제는 민간에서의 끊임없는 혁신과 견고한 노동시장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했고, 그 결과 경쟁국을 제치고 독주하고 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하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리스크는 경제 위기의 필수조건일 수는 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의 외향에서 한국이 선진국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선진국 수준의 법과 제도의 안정성을 갖추고 있는지에는 의구심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의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스템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유지된다면 한국 경제는 반등할 수 있을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정치가 경제를 끝끝내 집어삼켜 그동안 이룩해온 시스템이 무너진다면 경제는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고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한 나라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올해는 한국 경제의 진정한 분기점으로 보인다. 당장의 정치적 불확실성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눈앞의 문제에만 사로잡혀 장기적인 발전을 결정할 구조개혁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