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에 완전히 밀린 '사면초가' 한국…'美 호랑이굴'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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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들어가는 제조업…골든타임 5년 남았다한국 제조업은 그간 범용 제품 시장에서 가격 대비 성능(가성비)이 좋은 제품을 한발 빠르게 생산해 돈을 번 뒤 이 자금을 연구개발(R&D)에 투입해 신제품을 개발하는 식으로 경쟁력을 키워왔다. 이제 이런 공식은 통하지 않는다. 중국이 단순히 가격 경쟁력만 갖춘 게 아니라 기술력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한 중견기업 회장은 “글로벌 제조기업 삼성조차 동남아시아 스마트폰 시장에서 중국 기업에 완전히 밀렸다”며 “심각한 위기”라고 진단했다.
송두리째 흔들리는 한국 제조업
對中 수출비중 7년전 26.8%→19.7%
위안화 절하 땐 중 제품 30% 더 싸져
한국상품 경쟁력 더 추락…사면초가
'새판짜기' 美와 협력강화만이 살길
메모리·배터리·조선 더 적극 진출하고
주고객 빅테크 수요 맞추는게 최우선
한·미·일·대만 '칩4' 동맹급으로 뭉쳐야
소프트웨어 투자 포기하지 말고
새로운 소재·공정기술 선점해
기술 경쟁방식 바꾸는 것도 해법
사면초가 상황인 한국 제조업
기술 진전이 더딘 한국 기업은 가전, 디스플레이에 이어 반도체에서도 중국과의 가격·물량 싸움에서 밀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이 펴낸 ‘미·중 갈등 시대 한·미의 공동 번영을 위해’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이 세계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19%에서 2023년 34%로 급증했다. 한국 수출에서 중국 비중은 2018년 26.8%로 정점을 찍은 뒤 2023년 19.7%로 줄었다. 중국이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제품 자립에 나선 결과다.물론 한국 기업도 가만히 있진 않는다. 인건비 등 원가를 낮추기 위해 탈(脫)중국에 나서 동남아로 생산 거점을 우후죽순 옮겼다.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건 알지만 2~3년 생존할 시간이라도 벌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요즘엔 이 전략의 유효 기간도 얼마 안 남았다는 진단이 나온다. 미국의 전방위 규제에 중국은 ‘위안화 절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실행되면 중국 제품 가격은 지금보다 20~30% 저렴해진다. 4대 그룹 소속 정보기술(IT) 부품사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제조업은 짧게는 3년, 길게 봐도 5년이면 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제조업은 사면초가에 놓였다. 가만히 있으면 중국에 밟히고 제조업을 포기하자니 한국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린다. 한국 제조업이 살길은 무엇인가.
美 주도 공급망에 적극 올라타야
뾰족한 해법은 없지만 가장 먼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미국이 꼽힌다. 전문가들은 중장기 생존 전략으로 밀고 갈 카드로 ‘미국과의 경제 동맹 강화’를 제시한다. 미국은 자국에 첨단 제조 시설을 유치하는 데 주력하며 중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을 흔드는 ‘새판 짜기’에 나서고 있다. 이런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한국 제조업이 생존할 발판을 제공할 것이란 설명이다. 한국이 여전히 강점을 가진 메모리, 배터리, 조선 등을 앞세워 미국에 좀 더 적극적으로 진출하면 새롭게 구성되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글로벌 컨설팅 업체 커니의 김상규 부사장은 “한국 첨단 제조업의 주요 고객은 미국 테크 기업이기 때문에 미국 시장·고객의 수요를 맞추는 게 최우선”이라며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를 준수하면서 미국이 한국 제조업을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한국 미국 일본 대만으로 구성된 반도체 협의체 ‘칩4’를 동맹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적극 나서고, 한국 기업은 일본 대만은 물론이고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 인도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 국가와 협력해 중국을 대체하는 ‘알타시아 공급망(Alternative Asia Supply Chain)’을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한국의 반도체와 전자, 자동차산업은 알타시아 공급망의 중심축으로 기능하면서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분야에선 경제적 안보와 기술 경쟁력 유지 차원에서 한·미와 뜻을 함께하는 국가와의 ‘기술 동맹’이 필요하다”며 “칩4를 동맹국 간 완전히 통합한 협력체로 격상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조선·방위산업도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 공급망에서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며 “배터리는 탈중국 공급망을 통해 중국을 대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소프트웨어 경쟁력 강화도 필요
한국 제조업이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하드웨어를 잘 만드는 수준을 넘어 소프트웨어 분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투자에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는 조언도 제기된다. 스마트폰 세계 1위 기업(출하량 기준) 삼성이 스마트폰 운영체제(OS) 소프트웨어인 안드로이드를 구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미래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최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동시에 갖추는 건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컨데 애플은 아이폰을 만들고 iOS라는 운영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도체 칩까지 설계한다.세계에 ‘클라우드’란 개념을 가장 먼저 소개한 문송천 KAIST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엔비디아가 AI 반도체 1위에 오르고 AMD, 브로드컴이 엔비디아를 추격할 수 있는 건 모두 자체적인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며 “모두 늦었다고 하지만 한국 기업도 저력이 있다”고 말했다. 문 명예교수는 대표적 사례로 ‘타이젠’ OS를 개발해 TV에 활용하고 있는 삼성전자를 들었다. 그는“서버용 OS 등 시장은 노려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소재와 공정 기술을 선점하거나 기술 경쟁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도 생존 해법으로 제시됐다. 김상규 부사장은 “원천 소재 기술과 핵심 설비(장비) 기술은 첨단 제조업 발전의 기본”이라며 “지금은 일본 네덜란드 등이 장악한 분야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 기업이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의 3차원(3D) 낸드, TSMC의 최첨단 패키징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경쟁의 틀을 바꾸는 전략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정수/박동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