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명화가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사의 화음'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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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이미지형체가 없는 청각예술인 음악은 종종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다가오곤 한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듣다 보면 유장하면서도 한이 서린 블타바(몰다우)강이 눈앞에 그려지고, 안토닌 드로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4악장의 힘찬 음향 속에선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초원이 펼쳐진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알렉산드르 넵스키’에서 쉼 없이 튀어나오는 불협화음들은 얼어붙은 호수 위로 쥐새끼처럼 모국을 쳐들어온 사악한 침략자들의 움직임을 피부로 전한다. 그렇게 음악은 단순한 소리에 머물지 않고 눈앞의 이미지로 형상화돼 뇌리에 각인된다.
박찬이 지음 / 풍월당
512쪽|6만5000원
<음악과 이미지-회화와 기보에 깃든 선율들>은 ‘음대생보다 음악도서관에 더 자주 오는 미대생’ 출신 음악·미술 칼럼니스트가 쓴 악기와 미술이 함께 이뤄온 예술사를 다룬 책이다.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 리코더, 트라베소르 플루트, 오보에, 트럼펫과 같은 악기와 회화나 조각 같은 미술이 얽힌 ‘연애사’와 ‘결혼 과정’을 상세하게 담았다.때론 악기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14~18세기 제작된 하프시코드에는 화려한 장식과 그림이 필수조건으로 따라붙었다. 안트베르펜의 하프시코드 장인 한스 뤼커르스가 만든 하프시코드를 ‘화폭’ 삼아 얀 브뤼헐과 판 발런 같은 플랑드르 갈런드 회화파 화가들은 성화와 잎사귀, 꽃 등을 나눠 그렸다. 때로는 화가들 간의 협업이 안트베르펜에서 밀라노까지 전 유럽적 범위로 넓어지기도 했다. 뉘른베르크의 금속장인 요한 빌헬름 하스가 제작한 내추럴 트럼펫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이나 금관악기 장인 야코프 슈미트가 제작한 호른에 새겨진 ‘뉘른베르크에서 야코프 슈미트가 제작(MACHT IACOB SCHMIDT IN NURNBERG)’이라는 옛날 표기로 적힌 문구에선 단순한 음악 도구가 아닌 예술작품을 만들었다는 장인들의 자부심이 읽힌다.
곡은 연주되는 동시에 사라지지만 악기와 연주자들은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영생을 얻기도 했다. 요하네스 페이메이르, 피터르 브뤼헐, 에드가르 드가,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같은 화가들은 악기를 배경으로, 혹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모델 삼아 청각예술인 음악을 시각예술로 형상화했다. 화가들이 묘사한 그림 속 악기들은 때로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은유하기도, 감춰진 날것의 욕망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음악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사람들은 시대가 전하는 메시지를 읽어내곤 했다.
그림 속에 묘사된 악기들은 잊힌 역사를 들춰내기도 한다. 4개의 현을 지닌 요즘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달리 2~3개의 현을 지닌 레벡, 5개 이상의 현을 지닌 중세 피들, 6~7개 현을 갖춘 비올라 다모레 등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옛 악기들을 통해 오랜 기간 켜켜이 쌓인 ‘축적의 힘’을 느낄 수도 있다. 방랑자와 나그네, 불한당 그리고 악마의 악기에서 왕이 사랑한 악기로 변신한 바이올린의 역사라든지 가슴 아래, 배 위쪽에 바이올린을 놓고 켜다가 쇄골, 목, 턱 아래로 옮겨 연주한 바이올린 연주 위치의 변화상 같은 통시적인 음악사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음의 고저와 수의 비례 관계를 주목했던 피타고라스부터 십자가 형태의 기보를 통해 종교와 이미지, 음악의 결합을 다룬 역사까지 악기와 악보, 미술이 이뤄 온 ‘예술사의 화음’을 다루는 저자의 솜씨는 놀랍다. 433개의 화려한 화보가 명료한 문체의 본문과 정교하게 맞물려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한다. 혼자만 알기엔 아쉬운 내용을 가득 담은 콘텐츠 못지않게 책의 장정이나 구성도 예술작품에 비할 만큼 화려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책’이라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가 과해 보이지 않는다.
김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