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올해 미국에 가야 할 이유, 바로 이 전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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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한빛의 아메리칸 아트 살롱2024년 미술시장은 침체를 면치 못했습니다. 특히 경매시장의 하락세가 두드러졌는데,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글로벌 주요 경매사들의 경매 최고가 100개의 총거래가는 약 18억 달러(한화 약 2조 6500억원)를 넘지 못했습니다. 2023년의 24억 달러, 2022년 41억 달러에 비하면 2년 만에 초고가 시장이 반토막 난 셈입니다.
2025 미국의 미술관들, 무엇을 이야기할까
힐마 아프 클린트, 루스 아사와
여성 작가 내세운 MoMA
올 봄, 고전 작품들로 채워지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와
존 싱어 사전트 전시 예정되어 있어
2018년 힐마 아프 클린트를
세상에 알린 구겐하임,
이번엔 가브리엘 뮨터 소개해
남성중심 서양미술사에 변화 가져오나
모두 숨죽인 것 같지만, 시장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트시(Artsy)에 따르면 지난해 가장 비싸게 낙찰된 작품 50개 중 여성작가 작품은 4개입니다.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조안 미첼(Joan Mitchell)이 주인공입니다. 여성 작가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다는 뜻이겠죠?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시리즈인 ‘빛의 제국’은 지난해 11월 크리스티 뉴욕에서 1억 2116만 달러(약 1790억원)에 낙찰되며 가장 비싼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등극했습니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시장의 관심은 최근 몇 년간 지속됐는데, 지난해 드디어 그 결과가 나온 셈입니다. 시장 트렌드를 미리 읽어내려면 미술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지난 칼럼에서 전해드렸는데, 2025년 미국 주요 미술관의 라인업을 살펴보시면 근현대미술에서 어떤 작가와 사조가 관심을 받게 될지 미리 짐작해 보실 수 있을듯합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미국 주요 미술관의 예정 전시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MoMA, Art History에 가려졌던 'Her'story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와 루스 아사와(Ruth Asawa, 1926-2013)를 선보입니다.스웨덴 출신으로 세계 최초의 추상화가인 힐마 아프 클린트는 지난 2018년 말 구겐하임 미술관 개인전으로 그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영성에 대한 관심을 기하학적이고 생물학적인 형태로 표현한 그의 추상화는 1906년 처음 탄생합니다. 기존 미술사에서 최초의 추상화를 그렸다고 알려진 칸딘스키(1910년대)보다 수년 앞선 것이었기에, 전시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보러 온 사람만 60만명이 넘었고, 당시 구겐하임 60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은 전시로 기록된 바 있습니다.
미술사를 새로 쓰게 만든 그의 전시가 이번엔 MoMA에서 이어집니다. 5월 8일부터 9월 27일까지 1919년부터 1920년 사이 그린 수채화와 드로잉이 주인공입니다. 미술관은 정교하게 묘사한 꽃과 그 뒤에 그려진 다이어그램, 원, 점과 획이 함께 있는 이 드로잉들은 자연현상 뒤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면밀한 관찰에 기반한 상상을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표현한 그의 그림은 모든 생명체가 상호 연결되어있다는 철학에 기반합니다. 작가는 “식물 세계와 영혼의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노트를 남겼죠. 가을에는 루스 아사와의 회고전이 열립니다. 일본계 미국인인 작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철사를 꼬아 만든 독특한 패턴을 살린 조각이 유명하죠. 2중, 3중으로 구조가 겹치면서 만들어내는 유기적 형태가 독창적입니다. 조명까지 더해지면 그림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입체와 평면이 교차하는 이미지도 만들어집니다. 이민 2세였던 루스 아사와는 평범한 유년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가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강제 수용했는데,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 생활 끝에 대학에 진학했고, 교사가 되고자 했으나 ‘일본계’라는 이유로 취직하지 못했죠. 이후 1946년 미국 아방가르드 운동의 핵심이었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블랙마운틴칼리지로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1947년 멕시코 여행 중 바구니 뜨개질 기법에 영감을 받아 와이어를 활용한 조각을 만들었고, 이것이 그의 시각언어로 자리 잡습니다. 결혼 후 여섯 자녀의 엄마였던 그는 가난한 생활에 작업실마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엌 한켠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예술적 자아를 키웠고, 1950년대 휘트니비엔날레, 1954년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전시, 1955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해 명성을 쌓았습니다. 여성이자 이민 2세이자 가난한 엄마였던 그가 이룬 성취는 지금에 와서도 많은 관객에게 여전히 특별한 울림을 줍니다.
MoMA에서의 전시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작가 생애 전반에 걸친 다양한 작품 300여점이 나옵니다. 조각, 드로잉, 수채, 판화 등 다양한 재료를 탐구하며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형태를 탐험한 작가의 60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재료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더 궁금하고 그래서 이를 탐구합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추상과 구상, 인물과 배경, 긍정과 부정과 같은 그가 고민했던 주제가 시각 언어로 어떻게 펼쳐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 사후 최초의 회고전이며, 2026년 빌바오 구겐하임과 바젤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으로 순회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다시 보는 고전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고전을 선택했습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탄생 250년을 기념한 기획전(2월 8일-5월 11일)과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전시(4월 27일-8월 3일)가 나란히 봄을 장식할 예정입니다.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자연을 영적, 정서적 만남의 배경으로 묘사해 유럽 풍경화를 새롭게 구상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대표작으로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가 있는데, 한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서 한쪽 발을 바위에 걸친 채 안개 바다가 산등성이를 가득 채우는 것을 내려다보는 이미지입니다. 관객들은 인물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자연스레 상상하게 됩니다. 아마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동시에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들여다보게 하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이전의 풍경화가 신의 창조물인 자연을 찬양하는 것이었다면 프리드리히는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읽고, 감정과 목적을 투영한 것이죠. 미국에서 처음 열리는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으로, 베를린 국립미술관,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등 유럽 30여개 기관에서 작품을 빌려온다고 합니다.이어서는 미국 초상화가인 존 싱어 사전트의 개인전이 열립니다. 미국인이지만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며 사교계 유명인사들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사전트는 부드러운 빛의 운용과 특유의 색감이 인상적인 작가입니다. 보스턴미술관(2023년)과 테이트 브리튼(2024년)에서 사전트의 그림과 당시의 복식을 함께 비교하며 패션을 인물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데 활용했던 사전트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는 작가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던 10년, 즉 초기의 모습에 집중합니다.
‘어그로’를 끌어서라도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굶주려 있던 사전트는 늘 센세이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사교계와 가까이하면서 주요 인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그러했는데, 그 정점은 바로 ‘마담 X’였습니다. 1884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이 작품은 당시 파리 사교계를 주름잡던 고트로 부인(Madam Gautreau)을 그린 대형 초상화입니다. 작가 스스로는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며 뿌듯해했지만, 가슴 깊이 파인 까만 새틴 드레스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살짝 내려간 어깨끈의 묘사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문란한 이미지’라는 것이죠. 압박이 너무 컸던지 후에 작가는 흘러내린 어깨끈을 다시 고쳐 그렸지만(현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작품은 수정된 작품입니다), 이 때문에 파리를 떠나 런던에 정착해야 했습니다. 전시는 이 ‘마담 X’ 외에도 작가가 이탈리아, 네델란드,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담아낸 작품들과 사전트와 동시대 작가들이 그린 파리지앵의 초상화도 함께 살펴봅니다. 당시의 파리를 좀 더 입체적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구겐하임, 새로운 거장을 소개하다
구겐하임미술관은 차세대 미국 흑인작가로 유명한 라시드 존슨(Rashid Johnson, 47)의 대규모 개인전을 오는 4월 18일부터 내년 1월까지 개최합니다. 로툰다홀 전체와 바깥 야외 조각품까지 미술관 대부분을 그의 작품으로 채운 전시입니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는 미술사, 철학, 문학, 음악 등 전 분야를 개념적 틀로 자기 작품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전시 제목인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A Poem for Deep Thinkers)’는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미국 시인, 작가, 교사, 정치활동가인 아마리 바라카(Amiri Baraka, 1934-2014)의 시에서 따왔습니다. 설치를 포함해 회화, 텍스트 작품 등 작가의 주요 시리즈 대부분이 나올 예정입니다. 라시드 존슨의 작업은 작가가 어린 시절 겪은 개인적 기억과 아프리칸-아메리칸으로 성장하며 갖게 된 문화적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일상적 소재와 사물에서 출발해 철학과 사상으로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미술관은 물론 시장에서도 인기가 좋습니다. 현재 작가는 하우저앤워스와 전속계약을 맺은 상태입니다. 11월 7일부터 내년 4월 26일까지는 가브리엘 뮨터(Gabriele Münter, 1877-1962)의 뉴욕 첫 미술관 개인전이 열립니다. 뮨터는 독일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작가로, 청기사파의 결성에 관여했을 만큼 20세기 초 유럽 모더니즘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상당 기간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로 지냈으나, 칸딘스키가 일방적으로 러시아로 떠난 뒤 끝내 재회하지 못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칸딘스키가 추상회화를 선도하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정작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서도 본인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1980년부터 1920년까지 뮨터의 표현주의 작품과 후기 작품 약 60여점과 사진 12점을 선보입니다. 힐마 아프 클린트를 소개했던 것처럼 남성중심의 서양미술사에 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미술관은 뮨터의 작품에 대해 “강렬한 색채, 대담한 평면으로 정물, 풍경 초상화 등 정통적 장르를 재해석하고 급진적 추상화와 동시대적인 혁신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고 평가합니다. 이한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