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에서 노랑은 죽음을 뜻하지, 중요한 건 파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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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레퀴엠이 울리는 겨울이다. 연이어 들리는 뉴스들에 때로는 새하얀 밤을 지새우고, 때로는 검은 그림자에 짓눌린다. 국가애도기간으로 한 해를 매듭짓고 한 해를 시작한다. 심리학에서 애도는 슬픔에 충분히 들어가 앉아 있다가 잘 이별하고, 잘 보내주고, 다시 잘 일어서는 것을 뜻한다. 슬픔과 고통의 상황에 놓일 때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걸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고, 예술이 깊은 애도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우리 곁엔 늘 '파랑새'가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마
노란 죽음과 빨간 생명, 그리고 파란 일상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담은 작품
'젊은이와 죽음 (Le Jeune Homme et La Mort)'
행복을 일깨워주는 '파랑새 (Blue Bird)'
어수선한 시국 앞에서는 말이 많아졌지만, 생각지 못한 죽음과 이별 앞에서는 말은 채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 형체가 없는 말은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 끝에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그림들을 떠올렸다. 형체가 아니라 색으로 수많은 서사와 감정을 담아냈던 그 그림들처럼 위로는 말의 형체를 지니지 않아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발레에서 죽음은 노란색이다.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의 대본에 롤랑 프티(Roland Petit, 1924~2011)가 안무한 작품 '젊은이와 죽음(Le Jeune Homme et la Mort, 1946)'때문에 이런 인식이 생겼다. 이 작품은 피와 생명을 연상시키는 빨간 천 위에서 청바지를 입은 한 젊은 남성이 누워 있다가 춤을 추면서 시작된다.
사랑을 잃어버린 젊은이는 상실과 고통의 몸부림을 치고, 그에게 죽음을 상징하는 여성이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방문한다. 여인은 잃어버린 사랑, 잡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표상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것을 잡고자 하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끝내 그것을 놓지 못한 젊은이는 죽음에 유혹당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젊은이와 죽음(Le Jeune Homme et La Mort)]
무엇이 우리를 죽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발레 '젊은이와 죽음'가 실존적 작품으로 남을 수 있게 된 큰 이유는 바흐의 '파사칼리아와 푸가 C단조, BWV 582'을 음악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당시 20대의 젊은 롤랑 프티는 미국의 재즈음악을 쓰고 싶어 해서 고집을 부렸지만, 철학가이자 작가로서 깊이 남달랐던 장 콕토의 끊임없는 주장과 설득으로 공연 직전 바흐의 음악으로 바꾸게 됐고, 덕분에 이 작품은 유혹하는 여성과 젊은 남자의 치명적 사랑이야기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담은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20분이 되지 않는 짧은 작품이지만 초연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지금까지도 종종 무대에 올라올 정도로 발레사에 중요한 레퍼토리로 남았다. 영화 '백야'의 시작 부분에 등장한 걸로도 유명하다. 당시 이 영화에 출연한 발레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 1948~)는 이 작품으로 발레 애호가들 뿐 아니라 영화팬과 대중들에게도 각인됐다.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에 한 운동화 브랜드 광고 속에서 배우 이종원이 의자 위에 올라서서 넘어가는 춤 장면이 화제가 됐는데, 바로 '젊은이와 죽음'에 등장하는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지금 이별을 겪은 사람들이 상실과 고통의 강 끝에서 죽음이 아니라 다시 일상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 기도 속에 작가 모리스 메테르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는 6막 12장의 희곡 '파랑새'를 떠올렸다.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3막의 공주와 왕자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다양한 동화와 소설 속 캐릭터들이 축하의 춤을 펼치는데 이 디베르티스망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건 파랑새 파드되이다. 모리스 메테르링크는 '파랑새'를 통해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 행복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물레에 찔려 100년을 잠든 공주가 저주에서 깨어나는 판타지적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파랑새 파드되를 통해 공주와 왕자가 함께 살아갈 매일의 일상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며, 그 일상은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란 걸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