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속 트라우마까지 보듬는 '이상한 나라'가 열렸다

디렌리 개인전 '리멤버(ReMember)'
서울 청담동 탕컨템포러리서 25일까지
"황금빛 햇살 가득한 오후 우리는 한가로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네."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른한 오후에 깜빡 잠든 일곱살 소녀 앨리스가 꿈에서 겪는 모험 이야기. 길잡이 역할의 토끼부터 체스터 고양이, 여왕 등 독특한 캐릭터와 상상력 넘치는 전개로 두고두고 사랑받는 고전이다.
디렌리, 'Strolling Through the Dawn'(2024) /탕컨템포러리 제공
한국 작가 디렌리(이수연·41)의 신작 'Strolling Through the Dawn(새벽을 거닐다)'을 보면 이 고전의 첫 문장이 절로 떠오른다. 화가를 닮은 주인공이 동물들과 함께 무의식의 물결을 항해하고 있다. 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그림의 배경이 '황금빛 오후'가 아니라 동트는 새벽이라는 것. 잠든 사이 얻은 영감을 한아름 안고 현실로 복귀하는 주인공의 눈망울이 앨리스 보다 빛난다.

꿈과 무의식을 그리는 디렌리의 '이상한 나라'가 서울 청담동 탕컨템포러리에서 열렸다. '리멤버(ReMember)'란 제목으로 열린 이번 개인전에선 몽환적인 분위기의 신작 37점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된 작품들은 하나의 줄거리를 구성한다. 아침마다 전날 꾼 꿈을 기록한다는 작가가 자아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줄거리다.
디렌리, 'Gifted'(2024) /탕컨템포러리 제공
작가한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정체성의 혼란과 소재 고갈에 대한 두려움 등이 그를 위협한다. 동화 속 세계 같은 꿈이 작가의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다. "무의식은 인간 심리의 창조적 에너지원이다"라고 주장한 칼 융의 정신분석학 이론이나, 20세기 전쟁의 참상을 피해 꿈으로 도피한 초현실주의 사조와도 비슷한 맥락이다.지금은 중국과 대만 등에서 입지를 다진 차세대 신진 작가로 꼽히지만, 이전 10여년간 무명 시절을 겪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작가의 첫 직장은 문구 디자인 회사였다. 서른살이 넘어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초창기 작업은 주로 멸종위기 종을 다뤘다. 그는 "작가로서 사라져가는 내 모습이 멸종위기 동물과 겹쳐 보였다"고 말한다.
디렌리, 'Brave'(2024), 종이에 연필. /탕컨템포러리 제공
그의 화풍은 2010년대 후반 '샴 시리즈'로 한 차례 변화를 겪는다. 남편과 샴쌍둥이로 환생한 꿈을 꾼 것이 계기가 됐다. 다른 존재와도 한 몸을 공유하는데, 자신의 과거를 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부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끄러운 내면을 캐릭터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 제목도 여러 자아와 다시 마주했다는 의미에서 '리멤버(Re+Member)'다.
디렌리, 'A Place Without Time'(2024) /탕컨템포러리 제공
만화 캐릭터처럼 둥글게 그린 귀여운 캐릭터들도 이런 사연을 알고 보면 달리 보인다. 이번 신작에선 낮과 밤, 불과 물 등 상반되는 요소가 캔버스를 양분하는 구도가 돋보인다. 꿈과 현실, 상처와 치유가 공존하는 세계를 빗댄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공유한다. 서로 눈빛만 봐도 뜻이 통할 정도로 내면의 자아들과 화해했다는 의미일까.작가는 "나는 현실보다 더 생생한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매일 아침 꿈의 내용을 적고, 한 가지 붓만으로 터럭 한 올까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1년에 내놓는 작품도 10점 남짓. 중화권 아트페어에 주로 출품되는 그의 작품을 국내에서 만나볼 흔치 않은 기회다. 전시는 25일까지.
디렌리 개인전 'ReMember' 전시 전경. /안시욱 기자
디렌리(한국명 이수연) 작가 프로필 이미지. /탕컨템포러리 제공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