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조종실과 국무회의의 결정적 순간들

치명적인 위계적 의사 결정구조
위기 대비 소통구조 갖춰야

김형호 사회부장
“비가 더 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날씨 레이더 덕을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부기장)

1997년 8월 6일 새벽, 괌국제공항에 접근하던 대한항공 801편 조종실에서 부기장은 기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착륙 보조장치가 고장 나 기장은 시계 착륙을 시도 중이었다. 창밖에는 태풍 ‘티냐’의 영향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부기장의 혼잣말이라고 여긴 기장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불과 수 분 뒤 801편은 공항 인근의 니미츠힐과 충돌했다. 승객과 승무원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한 역대 최악의 항공기 참사였다.사고 후 국제 민간항공기구 조사에서 고장 난 장치의 허위 신호로 인한 혼란, 고도 확인절차 미확인 등 기술적 문제와 별개로 조종실의 의사소통이 핵심 사고 요인으로 지목됐다. 상사에게 직설적으로 조언하는 것을 꺼리는 한국식 완곡 화법이 사태를 방지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는 것이다. 당시 부기장이 “캡틴, 날씨를 보니 육안에 의존해 착륙을 시도할 상황이 아닙니다. 레이더를 보십시오”라고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웃라이어>의 저자 맬컴 글레드웰이 ‘하급자가 상급자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직접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운 한국식 기업문화’를 사고 원인으로 지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한항공은 이 사고를 계기로 조종실 내 의사소통 언어를 영어로 바꿨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6분 전인 오후 9시17분 국무회의가 소집됐다. 윤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 외에 10명의 장관만 참석했다. 회의록도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이날 회의에서 비상계엄 선포에 적극 반대한 국무위원은 최상목 현 대통령 권한대행(기획재정부 장관) 정도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참석자는 윤 대통령의 위세에 눌려 강한 반대 의사를 밝히지 못한 것으로 지금까지 확인됐다. 참석한 국무위원의 면면을 보면 왜 이들만 소집했는지 그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 총리를 비롯해 기재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은 행정관료 출신이고 외교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중소벤처중기부 장관은 외무부 출신 관료다. 법무부, 행정안전부 장관은 법조인 출신이다. 통일부 장관은 교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농촌연구원 출신이다. 대다수가 상명하복식 위계적 의사 구조가 지배하는 조직에서 일해온 인사다.

평소에도 직언하기 어려웠다는데 계엄령 선포를 밀어붙이는 대통령의 기세를 막아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계엄령 선포가 갖는 위법성과 심각성에 대한 국무위원들의 문제의식과 정무 감각 부재다. 일각에선 “그날 국무회의에 관록 있는 의원 출신 장관이 있었더라면 ‘이러면 다 죽는다’며 뜯어말렸을 덴데…”라고 아쉬움을 보였다. 지난달 이명박 전 대통령의 생일 축하 자리에 참석한 이재오 전 의원이 “나 같았으면 MB 멱살을 잡아서라도 반대했을 것이다”고 한 얘기를 웃고 넘기기에는 이후 벌어진 상황이 너무나 엄중하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때부터 핵심 자리에 기재부 관료와 검찰 등 특정 분야 인맥을 집중 발탁해 편중 인사 지적을 받아왔다. 역대 정부에서 ‘감초’처럼 내각에 기용하던 전·현직 국회의원 출신의 입각도 꺼렸다. 핵심 포스트에는 전문 관료, 검찰 출신 등 상명하복 문화에 익숙한 인사를 배치했다. 내각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다양성마저 고려하지 않았다. 직언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아예 하기 어려운 구조가 구축된 것이다. 수평적 소통구조가 사라지고, 다양성과 포용성이 없는 조직 내부에 쌓이는 가장 원시적 힘은 ‘폭주’ 본능이다. 모든 조직이 순혈주의, 획일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