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여인숙에서 보낸 하루 [고두현의 아침 시편]

풀밭에서 일박
고두현

별빛 아래 잠들었다
이슬 보듬고 깨어난 아침풀밭 이불 베개 속에
동전 몇 닢 감춰 놓고
또다시 길 떠나는

하늘 땅 구름 모두
가장 싼 숙박비로
하룻밤씩 묵어가는
푸른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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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작은 당나귀 한 마리를 데리고 여행을 떠납니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당나귀 등에 실린 빵을 꺼내 먹고 여유롭게 포도주도 한 잔 곁들입니다. 그러다 날이 저물면 숲의 정원에서 침낭에 몸을 감싼 채 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듭니다.

남자의 이름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입니다. 그 유명한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쓴 영국 작가이지요. 1850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프랑스에서 오래 요양했습니다. 로맨틱한 성격 때문에 많은 여성과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경치 좋은 곳이나 낯선 지방으로 여행 다니는 것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중 프랑스 남부 세벤 지역을 여행하면서 쓴 책이 《당나귀와 함께한 세벤 여행》입니다.

세벤은 지중해에서 가까운 남프랑스 산악지대입니다. 남쪽으로 조금 가면 멋진 대학 도시 몽펠리에가 나옵니다. 시인 폴 발레리의 해변 묘지가 있는 세트도 멀지 않습니다. 이곳의 흙과 바람 속에는 예술적인 기운이 섞여 있습니다. 스티븐슨보다 한 살 아래인 프랑스 음악가 뱅상 댕디와 향수의 여왕 샤넬도 이 고장과 인연이 있지요. 스티븐슨이 여행하던 150년 전에는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자연의 순수함이 온전하게 간직돼 있었지요. 그는 230㎞ 거리를 열이틀에 걸쳐 걸어갔습니다. 서울∼대전 거리를 2주일 가까이 노닥거리며 갔으니 ‘느림의 미학’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셈입니다.

떠나기 전에 그는 늙은 신부에게 당나귀 한 마리를 샀습니다. 볼품없고 초라하지만 침낭과 비상식량, 자질구레한 물품을 싣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암탕나귀. 그는 ‘그녀’를 모데스틴이라고 부르며 가파른 언덕과 계곡,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를 함께 건너갑니다. 밤에는 천혜의 숙소인 숲에서 잡니다.

그에게 자연은 너무나 안락한 여인숙입니다. 신비로운 천장과 천연의 양탄자가 깔린 최고급 여인숙! 밤새도록 별빛과 바람과 노랫소리로 그를 기쁘게 해주고 새벽마다 충실하게 깨워주는 그 ‘푸른 여인숙’이 고마워서 어떤 날은 금화 몇 닢을 놓고 떠나기도 합니다. 이 대목을 읽다가 너무 좋아서 쓴 시가 ‘풀밭에서 일박’입니다. 처음 떠올린 문장은 ‘별빛 아래 잠들었다/ 이슬 보듬고 깨어난 아침’이었습니다. 그가 금화 몇 닢을 놓고 떠나기도 했다는 대목에서 ‘풀밭 이불 베개 속에/ 동전 몇 닢 감춰 놓고/ 또다시 길 떠나는’이라는 구절을 얻었습니다.

금화를 동전으로 바꾼 것 말고는 크게 변용한 게 없습니다. ‘푸른 여인숙’이라는 표현도 그대로 따왔지요. ‘하늘 땅 구름 모두/ 가장 싼 숙박비로/ 하룻밤씩 묵어가는/ 푸른 여인숙’이라고 결구를 짓고 나니 군더더기 없이 딱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행 중에 그가 남기는 ‘한 말씀’들은 푸른 여인숙에서 올려다본 별빛처럼 명징합니다.
‘나로서는 어떤 한 장소로 가기 위해 여행하는 게 아니라 그저 가는 것 자체가 좋아서 여행한다. 중요한 것은 이동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과 장애가 되는 것들을 더 긴밀하게 느껴보는 것, 문명의 깃털로 된 침대를 빠져나와 날카로운 부싯돌이 섞여 있는 둥근 화강암을 발밑에 느껴보는 것,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천연의 양탄자가 깔린 최고급 풀밭’이자 ‘밤새도록 별빛과 바람과 노랫소리로 그를 기쁘게 해주고 새벽마다 충실하게 깨워주는 푸른 여인숙’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여행길에 그 파릇한 페이지를 하나씩 넘겨가며 자신을 돌아보면 눈과 마음이 맑아집니다. 150년 전 남프랑스 세벤 지역을 여행하며 자연의 내밀한 숨결을 느꼈던 그와 함께 우리 삶의 단면 또한 그렇겠지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