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키스 재럿이 그리운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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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봉호의 원픽! 재즈 앨범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Keith Jarrett)의 앨범들
최악의 상황에서 만들어낸 최적의 즉흥 연주
독자적인 스타일의 앨범

재즈 피아니스트의 세계에서 키스 재럿(Keith Jarrett)은 어떤 의미를 가진 아티스트일까. 음악 레이블을 넘어 일종의 장르로 자리를 굳힌 ECM의 대표주자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Bill Evans)의 뒤를 잇는 연주자라는 해석만으로도 아쉬운 감이 적지 않다. 20세기와 21세기를 이어주는 즉흥 연주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인물이라는 문장을 추가해 본다. 그렇게 키스 재럿은 현대 재즈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불세출의 마에스트로다.▶▶[관련 칼럼] 전설의 재즈음악가 빌 에반스는 끝내 우물 속으로 빨려들었지

[♪ <Facing You>에 수록된 'Lalenel']
[♪ <The Köln Concert>에 수록된 'Köln, January 24, 1975, Pt. II C' (Live)]
당시 주최 측의 실수로 키스 재럿이 원하는 뵈젠도르퍼 290 임페리얼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를 준비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참다못한 키스 재럿은 자신이 요청했던 피아노가 없다면 연주할 수 없다고 담당자에게 전했다. 이 상황에서 18세의 공연기획자였던 베라 브란데스(Vera Brandes)는 키스 재럿에게 마지막으로 연주를 간청했다. 키스 재럿은 그녀에게 이번 연주는 오직 당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공연장으로 향했다.관객의 기침 소리만 들려도 공연을 중단할 정도로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키스 재럿은 건강 문제까지 겹쳐 정상적인 연주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음악의 의외성이 드러난다. 노력만큼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대 이상의 반응이 터지기도 하는 것이 음악의 특성이다. 올해 50주년을 맞이하는 <The Köln Concert>는 1975년 발매 당시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 9위에 오르면서 ECM을 포함한 키스 재럿 최고의 음반으로 인정받았다.
키스 재럿의 음악은 <The Köln Concert>, <Sun Bear Concerts> 등을 축으로 한 즉흥 연주와 <Standards, Vol.1>, <Standards, Vol.2> 등으로 이어지는 스탠다드 연주로 구분이 가능하다. 필자는 20~30대에는 그의 즉흥 연주에, 40대 이후에는 스탠다드 연주 음반에 손이 자주 가는 편이다. 지금까지 수집한 키스 재럿의 음반이 40여 장에 달하는 관계로 원픽 앨범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러 매체에서 언급했던 <The Köln Concert>를 다시 포스팅하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 <Sun Bear Concerts>에 수록된 'Kyoto, November 5, 1976 (Part 1)']
[♪ <Standards, Vol. 2>에 수록된 'Moon And Sand']
그 때문에 다른 형태로 만들어진 그의 초기 음반을 골라 보았다. ECM에서 보여준 키스 재럿의 연주는 독주와 트리오 형태가 일반적이다. 솔로 콘서트에서는 주로 즉흥 연주를 즐기며, 트리오 콘서트에서는 스탠다드 연주에 도전하는 그의 성향을 감안할 때 추천작인 <My Song>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스타일의 앨범이다. 멤버 구성도 전성기 트리오 시절의 베이시스트 게리 피콕(Gary Peacock)과 드러머 잭 디조네트(Jack DeJohnette)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My Song>에서는 키스 재럿을 필두로 색소포니스트 얀 가바렉(Jan Garbarek), 베이시스트 폴 대니엘슨(Palle Danielsson), 드러머 존 크리스텐슨(Jon Christensen )이 참여했다. 키스 재럿을 제외한 3명의 멤버 중에서 두각을 보인 연주자는 얀 가바렉이었다. 특히 ‘My Song’에서 들려주었던 멜로딕한 사운드는 평소 실험적인 즉흥 연주에 몰두했던 얀 가바렉의 색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곡의 시작을 알리는 키스 재럿의 내향적인 건반 터치는 얀 가바렉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해준다.
[♪ <My Song>에 수록된 'My Song']
[♪ <My Song>에 수록된 'Country']
이제 키스 재럿은 더 이상 라이브 무대를 펼칠 수가 없다. 무대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그의 열정적인 연주를 다시는 만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그가 빚어낸 모든 연주가 작은 이별의 시그널로 다가온다. 거침없이 산화하는 시간이라는 전차 앞에서 인간은 먼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번에는 1999년에 발표했던 키스 재럿의 음반 <The Melody At Night, With You>를 듣고 있다. 그가 건반 위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눈물 앞에서 작은 염원을 빌어본다. 부디, 병환을 이겨내고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기를.
이봉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