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어려워도 암살이 편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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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아웃 오브 넷플릭스독일의 극우 정치 지도자 만프레드 페스트의 암살을 기가 막힌 솜씨(약 3200m 거리에서 저격에 성공했는데, 총알이 날아가는 시간만 6초 걸리기 때문에 사격 전문가들은 이건 미래를 내다보는 솜씨라고 혀를 내두른다. 왜냐하면 사격자는 6초간 저격 대상이 움직이는 동선을 예측해야 하기 때문이다.)로 성공시킨 후 스페인 카디스에 있는 집에 돌아온 킬러 자칼(에디 레디메인)은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인 아들과 오랜만에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낸다.
데이 오브 더 자칼(The Day of the Jackal)
그는 국제금융업자 찰스로 신분을 속이고 있는데 에피소드 회차 중반이 넘어서면서 아내인 누리아(우르술라 코르베로)가 남편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녀는 자칼에게 화를 내며 묻는다. “그 두 가지가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킬러 자칼과 남편 찰스. 누리아는 그 두 존재가 양립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은 것이다. 심하게 바가지를 긁은 셈이다.자칼이란 오리무중의 존재를 추적하는 영국 비밀첩보수사대 303(아마도 실재하는 국방부 경찰대, 대테러수사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소속의 비앙카(라샤나 린치)는 총기 전문가이다. 그녀는 독일 정치인 만프레드 페스트의 암살에 엄청난 사격술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저격에 딱 맞는 총기를 수제로 제작해 준 누군가가 동원됐음을 감지한다.
비앙카는 상부에 북아일랜드 테러리스트(IRA가 아닌 왕당파 소속)인 노만 스토크(리처드 도머)를 지목하고 10년간 은둔하고 있는 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동생인 래리 스토크(패트릭 오케인)를 통해야 하는데 그건 오랫동안 정보원으로 이용하고 있는 앨리스라는 이름의 래리의 아내(케이트 딕키)를 닦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앙카는 바쁘다. 런던과 벨파스트를 오가야 한다. 너무 정신이 없다. 시간 강사인 남편인 폴(술래 리미)은 혼자서 딸 쟈스민(플로리사 카마라)을 도맡아 키울 수밖에 없다. 비앙카와 폴 부부는 각각 이혼 후 재혼한 커플로 폴은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폴과 쟈스민은 계부와 의붓딸 관계이다.에피소드 중반을 넘어서면서 폴은 비앙카에게 말한다. “가족이란 '이제 그만 당신들에게 전념할래' 하는 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야. 당신은 늘 일이냐 가족이냐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처럼 구는데, 그런 것 자체가 문제야”라고 말한다. 폴도 아내인 비앙카에게 바가지를 긁는 셈이다.영국(제작사 sky)과 미국(제작사 피콕)의 합작 드라마로 원래는 아마존 프라임 스트리밍 작품이지만 국내에서는 OTT 웨이브에서 방영 중인 10부작 드라마 ‘더 데이 오브 더 자칼’은 ‘미끈’하면서도 ‘새끈’한 작품이다. 엄청난 제작비를 들였고 프로덕션에 실로 세심한 공을 들였다. 암살자 ‘자칼’을 소재로 한 영화는 지금껏 두 편이 만들어졌는데 두 편 모두 다, 그리고 이번 드라마 역시 원작자인 프레데릭 포사이즈의 동명 소설 <자칼의 날>에 기대고 있는 작품이다.
원래 소설의 내용은 프랑스 극우 테러 단체인 OAS가 샤를 드골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킬러 자칼을 고용해 음모를 벌이는 이야기이다. 자칼은 사격술과 변장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원작의 모든 인물과 사건의 배경에는 북아프리카 알제리 식민투쟁이 있다. 드골은 결국 국내외 인권운동과 여론에 굴복, 알제리 독립을 허용했던 대통령으로 이 과정에서 군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군부는 그를 죽이려 했다. 그 역사적 스토리를 첩보 스릴러로 만든 것은 1973년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만든 ‘쟈(자)칼의 날’이다. 자칼 역으로 에드워드 폭스가 열연했다.반면에 1997년 영화 ‘자칼’은 브루스 윌리스, 리처드 기어, 시드니 포이티어가 나온 작품이었다. 배경을 드골 같은 정치 요인에 대한 암살이 아니라 북아일랜드 IRA 사태로 바꾸었다. 자칼 역의 브루스 윌리스를 포함해 배우들의 연기 합이 나름 나쁘지 않았던 작품이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 글 앞부분에 자칼과 아내 누리아, 특공팀장 비앙카와 남편 폴의 얘기를 장황하게 넣은 것은, 포사이즈의 원작과 1973년 첫 영화가 암살범 자칼의 캐릭터를 냉혈한으로 그려 내고 전체 극의 분위기를 극도로 드라이한 하드 보일드 스타일로 만들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2020년대의 ‘더 데이 오브 더 자칼’에서의 암살범 자칼과 그를 좇는 수사관 비앙카 모두 가정의 문제, 개인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현대사회의 삶은 거대 담론(정치와 이데올로기)과 소확행의 삶이 양립돼야 함을, 전자는 후자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번 10부작 드라마 ‘더 데이 오브 더 자칼’은 드라이 하다가도 말랑말랑해지고 말랑말랑하다가 냉소적이고 드라이해지는 톤의 전환을 왔다 갔다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게 좀 별로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 킬러도 아버지이고 수사관도 어머니인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예컨대 조지 클루니 주연의 2010년 작으로 안톤 코르빈이 감독한 ‘아메리칸’(마틴 부스 소설 <미스터 버터플라이>가 원작)에서 주인공 킬러는 자신에게 애틋하게 매달리고 자신도 아끼고 예뻐했던 여자를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자 가차 없이 쏴 죽인다. 이번 드라마 ‘더 데이 오브 더 자칼’에서는 그런 냉혹함이 없다.
주인공 자칼이 유럽 곳곳을 다니며 저격을 하는 만큼 드라마는 관광지의 눈요기를 잔뜩 펼쳐 보인다는 점도 이 10부작의 매력이다. 스페인의 항구 도시 카디스가 나오고 독일의 바이에른, 벨라루시의 숲, 크로아티아의 환상적인 섬,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헝가리 부다페스트, 그리고 런던과 파리 등등 이 드라마는 일종의 유럽 여행기와도 같다. 그 맛이 삼삼하다.
회차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사운드 트랙도 내용에 맞춰 정교하게 선곡을 한 느낌을 준다. 샘 브룩스의 ‘블랙 페더스(Black Feathers)’을 비롯해 닐루파 야나가 부르는 리드 오브 미(Rid of me)’ 등이 나온다. 오프닝 곡은 유명 소울 가수 설레스트가 부르는 ‘이게 나야(This is who I am)이다. 노래가 딱딱 들어 맞는다.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변장하고 늙은 청소부 역을 대역 없이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출중한 연기자임을 알 수가 있다. 주근깨가 잔뜩 나 있는(못생겼지만 나름 귀엽고 매력 있는) 얼굴로 각종의 메소드 연기를 펼친다. 레드메인은 엄청난 개런티를 받을 가치가 충분한 배우이다.
아 참, 이번 ‘더 데이 오브 더 자칼’에서의 암살 대상은 울레 다그 찰스라는 인물(칼리드 압달라)이다. 그는 UDC란 회사의 최대 지분을 지닌 디지털 갑부인데 그가 내놓은 신제품 ‘리버’가 문제가 된다. 리버는 전 세계 갑부의 재산 상태와 회계를 몽땅 노출할 수 있는 소프트 프로그램이다. 그러니까 그를 죽이려는 자, 바로 세상의 갑부들이다.
아 참 또 하나. 이 영화에서 킬러 자칼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오히려 수사관인 비앙카보다 우월하다. 비앙카는 정의를 세우는 척, 온갖 치사한 짓을 한다. 국가 기관과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엿보인다. 자칼의 최후와 비앙카의 최후 중 누가 더 비극적일까. 그걸 찬찬히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흥밋거리이다. 이 10부작 드라마는 종결되지 않았다. 아마도 시즌2를 기약하고 있을 것이다. 시즌2는 10부까지 안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 드라마에 대한 유일한 불만일 수 있겠다.[드라마 '데이 오브 더 자칼' 공식 예고편 | 웨이브 해외시리즈]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