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정치혼란에 노출된 韓銀 독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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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 뉴욕 특파원

벤 버냉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흘 일정으로 열린 ‘2025 미국경제학회(AEA)’ 연례총회에서 Fed에 전한 당부다. 버냉키 전 의장은 행사 마지막 날인 5일(현지시간) 세션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 유지에 대해 “(Fed가) 인플레이션 2% 목표를 세우는 게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인들이 비둘기적(통화 완화 선호) 통화정책을 요구하더라도 Fed는 “우리는 2% 목표를 바꿀 수 없다”고 대응해야 한다는 게 버냉키 전 의장의 설명이다. 그의 발언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 후 기준금리 결정에 개입하겠다고 시사한 뒤 Fed의 독립성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와 더욱 주목받았다.
Fed 독립성 지킨 버냉키
버냉키 전 의장은 시장과의 소통도 함께 강조했다. 그는 Fed 의장 시절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이 예상하는 향후 금리 경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점도표 도입을 주도했다. 시장과의 소통을 통해 Fed의 통화정책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취지였다.버냉키 전 의장의 통화정책에 대해선 여전히 평가가 엇갈린다. 금융위기에서 경제를 구해냈다는 찬사도 받지만, 돈을 살포하는 방식으로 대형 금융회사를 구제해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문제를 심화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하지만 Fed의 독립성과 시장 소통을 개선한 공로는 공통적으로 인정받는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당시 Fed의 국채 매입 계획을 거세게 비판했을 때도 정책 신념을 지켰다. Fed 역사상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정례화하기도 했다.
뒷말 나온 국회의장의 한은 방문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제롬 파월 Fed 의장과 줄곧 각을 세웠다. 그는 대선 전엔 금리 인하에 반대했다. 금리 인하가 민주당을 돕는 일이란 이유에서다. 지난해 6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재선 후 파월 의장을 해임할지에 대해 “(파월 의장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될 경우”라는 단서를 달아 해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하지만 파월 의장은 “선거 결과를 염두에 두고 통화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며 지난해 9월 금리를 인하했다. 파월 의장은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자신을 해임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밝혔지만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다. 마이클 바 Fed 금융감독 담당 부의장은 해임 가능성에 대해 법률 자문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에서도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는 끊임없이 이슈가 되고 있다. 대통령실은 지난해 8월 한국은행이 금리를 동결하자 이례적으로 “아쉽다”는 반응을 내 논란을 일으켰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달 국회의장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서울 남대문 한국은행 본관을 찾았다. 그가 이 자리에서 이창용 총재와 약 40분간 면담하며 금융시장 안정 조치 등을 당부하자 역시 뒷말이 나왔다.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여차하면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정치권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때일수록 버냉키 전 의장의 당부를 새겨야 한다. 한은이 정치 포퓰리즘에 동원된다면 그 폐해는 계엄·탄핵 사태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