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불가마에서 묵은 때같은 나쁜 기억 씻고 가세요”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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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불가마“여전히 불가마 안은 지옥처럼 뜨거웠고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땀이 날 때까지 도망치지 않고 버텼다는 것. 그 기다림의 시간이 살갗 위 오직 1밀리미터 높이의 공간에만 바람이 부는 천국을 만든 것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낙원이었다. 주연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뜨거움 앞에서 땀이 날 때까지 견디지 못하고 매번 너무 빨리 문을 열고 뛰쳐나갔던 것이다.”
정소정 지음/나무옆의자
226쪽|1만5800원
장편소설 <꿈의 불가마> 속 주인공 주연은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스물아홉살 취준생이다. 가장 월세가 싼 원룸으로 이사했으나, 설상가상으로 집 수도관마저 터져버린다. 그러다 전 주인이 남기고 간 목욕권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하고, 약도를 따라 여성 전용 불가마 ‘미선관’에 도착한다. 정소정 작가의 소설 데뷔작인 이 작품은 ‘2022 한경 신춘문예’ 스토리 부문 1등 당선작이다. 정 작가는 직장을 다니던 중 연극 ‘지하철 1호선’ 4000회 기념 공연에 감동받아 퇴사하고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모래섬’, ‘뿔’, ‘가을비’ 등의 연극 대본을 썼다. 드라마 대본으로 쓴 ‘미쓰 불가마’가 한경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이를 소설로 바꾼 것이 <꿈의 불가마>다. 정 작가는 “목욕탕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피부에 닿는 따뜻함이 적지 않은 위로를 주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두 땀을 흘리는 그곳에서 불가마는 공연장처럼 변한다”며 “누가 이야기를 하면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고 했다.
소설에 이런 따뜻함과 소통이 담겨 있다. 미선관엔 서로의 나이도 직업도, 이름도 묻지 않는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 뒤에 ‘언니’를 붙일 뿐이다. 미선관의 터줏대감인 ‘대장 언니’, 플라스틱 얼음 컵을 들고 다니며 늘 얼음을 입에 물고 있는 ‘얼음 언니’를 비롯해 ‘카운터 언니’, ‘액세서리 언니’, ‘강남 언니’ 등이 있다. 친근한 호칭 때문인지, 서로 벌거벗은 몸을 보여주며 함께 땀을 흘리기 때문인지, 불가마 안 여자들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며 서로 마음을 나눈다.정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진흙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단단하고 빛이 나는 도자기가 되듯, 그렇게 사람도 가마 속에서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로 변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다 보면 어느새 읽는 이의 근심도 가마에서 흘리는 땀처럼 씻겨 나가게 하는 작품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