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이공계 대학 절체절명의 위기…"강도높은 구조조정 필요"

국내 이공계 대학원이 더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양자기술, 바이오 등 첨단 기술 개발에 필요한 수월성을 확보하기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는 지적이다.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이공계 대학원 혁신 방안' 보고서를 7일 내놨다. 세계 유례없는 인구 감소세에 비춰 지금으로부터 15년 뒤엔 수도권 일부 대형 사립대와 지방 거점국립대 등 상위 20여 개 대학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학은 대학원생을 한 명도 유치하지 못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보고서는 "반도체와 AI, 바이오, 양자컴퓨팅 등 미래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는 기술은 최고 수준을 달성하는 데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며 "범용 인재보다는 소수의 창의적 인재가 중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수요에 따른 우수 과학기술 인력을 선별적으로 육성해 학령인구 감소 위기에 대응하고, 여건과 역량을 갖춘 대학원은 세계적 연구 거점으로 집중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보고서는 "국내 대학 연구실은 연구실 운영을 위한 최소 연구비가 결정되고 이를 충족시킬 과제가 정해지면 모든 연구비가 연구실 계정 하나로 통합 운영된다"며 "연구실에서 창출하는 성과와 개별 과제의 연관 관계도 명확치 않다"고 지적했다. 개인별로 외부 과제를 수주한 뒤 지도교수 등 연구 책임자가 관리하는 주머니로 몰아넣는 통에 인건비 할당이나 과제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자금 배분 등이 제대로 이뤄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스타이펜드(연구생활장려금) 지급을 결정했으나 지급 대상과 시기 등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예산이 600억원으로 전체 대학원 인건비의 6%에 불과해서다.2009년부터 학생인건비 통합관리제(일명 학생인건비 풀링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이 역시 R&D 사업 취지와는 어긋나는 결과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학생인건비 풀링제는 연구책임자(교수)가 여러 연구과제의 학생인건비를 한 계정에서 통합 관리하는 제도다. 월별 학사 100만원, 석사 180만원, 박사 250만원으로 인건비 상한이 정해져 있다.

그간 이 상한에 못 미치는 인건비를 지급하면서 남는 금액을 적립해 교수가 다른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2023년까지 누적된 대학 인건비 잔액은 6000억원 가량이다. 과기정통부는 작년 10월 학생인건비를 1년치 이상 적립하고 있는 연구책임자(교수)는 학생인건비 잔액에서 1년치 지급분을 제외한 금액의 20%를 대학 계정에 의무 이체하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보고서는 "석사 2~3명, 박사 1~2명으로 구성된 이공계 연구실을 운영하려면 2억원 이상이 필요하지만 국내 대학 연구과제의 평균 연구비는 8000만원 수준으로 교수들이 서너개 과제를 동시에 할 수 밖에 없다"며 "과기부와 교육부의 기초연구 사업이 2017년 1.24조원에서 2022년 2.5조원으로 2배 이상 증가했지만 체감을 못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구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이와함께 과기정통부와 교육부 등 부처별로 난립한 집단연구 과제를 통폐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적었다. 4단계 BK21사업, 기초연구 사업, 교육부의 G-LAMP, 과기정통부의 선도연구센터(IRC), 과기정통부와 교육부가 올해부터 공동 추진 예정인 NRL2.0 사업 등을 통합해 '대학원 특성화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2년의 경우 국내 대학 연구실이 지원받은 금액은 9조6663억원이다. 이 중 과기정통부 R&D와 타 부처 R&D, 교육부 기초연구, 산학협력 매칭 등으로 지원한 돈이 7조2951억원이다. 교육부가 고등교육재정지원사업으로 투입한 자금은 2조3712억원이다. 4단계 BK21 4080억, 산학연협력선도대학육성(LINC3.0) 4070억, 지자체-대학 협력 기반 지역혁신(RIS) 2440억 등이다. 이들 사업이 거의 다 학술적 논문 작성만을 목표로 하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됐다는 지적이다.

IRC가 당초 목적과 다르게 기형적으로 변질됐다는 분석도 내놨다. 보고서는 "IRC가 벤치마킹한 미국 NSF의 ERC는 1985년 프로그램 시작 후 10년 지원을 받고 졸업한 54개 센터 중 2023년에도 44개가 여전히 대학 거점으로 지속되고 있으나, 우리는 대부분 센터가 지원 종료 후 소멸된다"고 적었다. 대학 부설 연구소도 2022년 5586개에 이르렀지만 연구소당 전임연구원이 1명도 채 되지 않는다. 연구비 수주 목적으로 급조한 뒤 '먹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얘기다.박사 인력 공급이 과잉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보고서는 "이공계 박사 배출 규모 대비 일자리 숫자는 1990년대 2.6배에 달했으나 2000년대 이후 박사인력 배출은 5배 가까이 늘었음에도 일자리 증가는 큰 변화가 없었다"며 "고교 성적 우수 학생의 의학계열 선호와 이공계 기피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공계 박사의 수급 불일치로 인한 노동시장 악화와 취업률 하락에 있다"고 지적했다.

박사 과잉 공급은 대학 내 열악한 처지의 포닥(박사후 연구원) 인력의 증가로 이어져 박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대로 이어진다. 이는 우수한 학부생들의 대학원 진학 기피로 연결될 뿐 아니라 박사인력의 장기적인 하향 취업을 유발해 연쇄적으로 석사와 학사 시장에도 영향을 주는 악순환이 정착됐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대학원의 상황에 맞춰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을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방 대학원이나 규모가 작은 대학원은 석사과정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지역 산업과 기업 수요에 부응한 R&D에 집중하고, 논문 중심 기초연구를 배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함께 박사 중심 대학원은 세계적 수준을 지향하는 연구중심대학과 기술 분야별 특화 대학원으로 나눠야 한다고 적었다. 학령인구 감소 추이나 고등교육의 규모 등으로 볼 때 연구중심대학 숫자는 20~30개 선이 적당하다고 분석했다.보고서는 "교수와 석·박사 대학원생, 기타 지원인력으로 구성된 교수 연구실을 기본으로 한 현재 대학 R&D 체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미래 성장 동력 확보라는 국가 현안 해결을 위해 이공계 대학원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