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지각생 韓, 반도체·로봇 '제조 SW 생태계' 공략해야 승산

'빅 퀘스천' 대한민국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7) 한국은 AI주권을 사수할 수 있나

AI 기술전쟁 생존 키워드는 SW

제조업체가 실용적인
AI 구현하려면
전문성 갖춘 SW회사와
연합군 꾸리는 게 첫걸음

내년 SW 시장 5000兆…롤모델은 에스리
세계 1위 지리정보시스템 에스리 '아크GIS'
월마트·페덱스 등 35만여개 기업이 사용
AI 시장 놓쳤다면 'AI와 연결하는 SW'에 주력
한국, 제조 하드웨어에 AI 접목할 SW 개발
부족한 SW역량, AI 에이전트로 만회 가능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에 올라선 이유는 언어와 문해력 덕분이었다.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 역시 언어와 수식으로 적힌 논문의 축적을 통해 이뤄졌다. 인공지능(AI)은 이 방벽을 속절없이 무너뜨렸다. 지난해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 모두 AI 기술의 토대를 놓은 과학자들에게 돌아간 것은 인류 사회를 뒤흔든 AI의 파괴력을 인정해서다. AI의 본질은 데이터와 알고리즘, 그리고 반도체 등 컴퓨팅 인프라를 최적으로 조합한 소프트웨어(SW)다. 7일 가트너에 따르면 올해 세계 SW 시장 규모는 3조413억달러(약 4473조원)로 예상된다. 반도체 시장 전망치 7167억달러(약 1054조원)의 네 배를 훌쩍 넘는다. 내년 SW 시장은 5000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반도체 종착점은 최적화 SW

그래픽=전희성 기자
AI가 모든 산업에 침투하면서 SW 시장의 성장 속도가 유례없이 빨라졌다. 추론하는 차세대 반도체 PIM(프로세스 인 메모리), 게이트올어라운드(GAA) 다음 단계의 반도체 구조인 상보형 전계효과 트랜지스터 ‘C-펫’ 개발의 열쇠도 초저전력을 구현하는 최적화 SW에 달렸다.

인공지능(AI)은 한국이 취약한 분야다. 원천기술, 자본력 등에서 미국 빅테크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AI 기술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이후 70여 년간 수학과 물리학, 전자공학과 컴퓨터과학 등이 축적되고 수많은 부침을 거쳐 현재의 AI가 탄생했다. 국내에서는 2017년 알파고 등장 이후 대중에게 알려졌지만 사실 그 연원은 생각보다 훨씬 깊다. 한국이 AI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비교우위가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월마트, 스타벅스, 페덱스 등이 각국 도시에 매장을 낼 때 항상 찾는 기술이 있다. 지리정보시스템 세계 1위 기업 에스리의 ‘아크GIS’다. 아크GIS는 유동인구, 교통 등 다양한 지리정보 데이터와 고객 기업의 경영 데이터를 하나로 통합해 활용할 수 있게 하는 AI 소프트웨어다. 전 세계 20억 명이 사용하는 구글맵도 에스리의 SW가 있어야 완성된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IBM 등 미국 시장을 이끄는 빅테크를 포함해 전 세계 35만여 개 기업이 에스리의 SW를 쓰고 있다. AI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후발주자인 AI 분야에서 살아남으려면 ‘SW 구멍’을 빠르게 메워야 한다”며 “에스리 같은 강소 SW 기업이 많으면 글로벌 AI 생태계의 일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반도체 밸류체인에서도 SW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반도체는 설계-디자인-제조-산화-포토(감광)-식각-증착-배선-EDS(검사)-패키징이라는 10단계 공정을 거친다.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가 연결되는 AI 시대엔 가장 앞단인 설계와 마지막 단계인 패키징 기술이 중요하다. 둘 다 SW가 중심이지만 한국은 이 분야 원천기술이 없다. 최근 국내 반도체 기업이 고전하는 이유 중 하나다.

반도체 트랜지스터의 3차원 구조인 핀펫을 세계에서 처음 개발한 석학인 이종호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설계와 패키징은 한국 반도체 밸류체인의 가장 아픈 고리”라며 “어마어마한 가짓수의 조합 최적화 문제여서 24시간 연구 체제로 매달려야만 확률적으로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조업에 AI 에이전트 접목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방위산업과 동전의 양면인 우주 기술 확보도 SW에 달렸다. 발사체(로켓)와 군용 정찰 위성의 핵심 기술은 유도항법제어(GNC)다. 재사용 발사체 개발로 세계 우주산업 패권을 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어떤 기업도 흉내조차 못 내는 독보적인 GNC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스페이스X의 기업가치가 최근 3500억달러(약 514조원)로 평가받은 것은 이 같은 경쟁력과 무관하지 않다.GNC는 수리과학 알고리즘 기반 SW로 구현된다. GNC 기술을 물리적으로 실현하려면 범용 반도체가 아니라 FPGA(필드 프로그래머블 게이트 어레이) 등 주문형 반도체가 필요하다. 막대한 양의 GPS 신호를 송수신 처리하기 위해서도 FPGA가 필수다. GNC의 마지막 퍼즐은 SW 기술이다. 방위사업청이 국방 반도체와 SW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일반적인 제조업체도 AI와 연결할 수 있는 SW가 필수다. AI는 선형대수, 편미분방정식 등 수리과학 알고리즘과 반도체로 구성된 계산 기계다. 인간 뇌의 뉴런에 해당하는 파라미터(매개변수)가 수천억 개 이상으로 많아지면서 글과 이미지 등을 만들어내는 생성 AI를 넘어 ‘추론하는 AI’로 진화하고 있다. 추론하는 AI의 초기 버전이 최근 거론되는 AI 에이전트다.

최근 국내 제조 대기업들은 부족한 SW 경쟁력을 AI 에이전트를 통해 보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올해 기업공개(IPO)에 나서는 공작기계 국내 1위 기업 DN솔루션즈(옛 두산공작기계)는 AI SW 스타트업 애자일소다를 통해 AI 에이전트 도입을 추진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제조업체가 실용적인 AI를 구현하려면 전문성을 갖춘 SW 회사와 연합군을 꾸리는 게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AI 다음 스텝, 양자 시대 준비해야

미국 빅테크 대부분은 SW 기업이다. 축적된 SW 기술이 빅테크를 낳고, 빅테크가 SW 기술을 다시 발전시키는 선순환이 정착돼 있다. 구글은 AI SW 업체 딥마인드를 2014년 인수하고 2년 뒤 알파고를 내놔 세계를 경악시켰다. 뒤이어 알파폴드라는 AI 소프트웨어로 단백질 접힘 문제를 시각화해 신약 개발에서 전인미답의 문을 열었다. 이는 지난해 노벨화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MS가 챗GPT를 개발한 오픈AI 지분 절반 가까이를 인수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엔비디아의 진정한 힘도 그래픽처리장치(GPU) 병렬 처리 성능을 극대화하는 SW인 쿠다에서 나온다. 엔비디아는 이 지배력을 양자컴퓨터로 이전하기 위해 SW 쿠다-Q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미국 나스닥시장에서 주가가 급등한 리게티컴퓨팅은 쿠다-Q와 연결된 클라우드 기반 ‘풀스택’ 양자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에 따르면 2025년부터 2030년까지 글로벌 양자컴퓨터 SW 시장 증가율은 663%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드웨어 증가율 예상치 317%의 두 배를 넘는다. 과학계는 AI SW의 근간인 인공신경망(ANN)이 양자컴퓨터와 만날 때 완성될 것으로 보고 있다. 양자기술은 인간을 초월하는 AI를 현실화하는 동시에 의료·바이오, 교통·물류, 우주항공, 소재·화학 등에서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게임체인저다. 미국과 캐나다에선 아이온큐 리게티컴퓨팅 디웨이브 등 양자컴 스타트업이 아마존 구글 MS IBM 등 빅테크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양쪽에서 합종연횡하며 양자컴 상용화에 바짝 다가섰다. 한국은 이런 생태계가 전무하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