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현대차그룹, 트럼프에 '10조' 선물…제철소 짓는다

10조 투입해 年 수백만t '철강 전초기지'

현대제철, 車 강판 등 현대차·기아 공장에 납품 계획
이르면 내년 봄 착공…'트럼프 2기' 출범도 고려한 듯
사진=연합뉴스
현대자동차그룹이 미국에 약 10조원을 투자해 철강산업 기지를 건설한다. 현대제철을 중심으로 제철소를 짓고 이곳에서 생산한 자동차용 강판 등을 인근 조지아주 현대차·기아 공장 등에 공급한다는 구상이다.

7일 한·미 경제계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하는 제철소 건설을 목표로 미국 텍사스, 조지아, 루이지애나 등 여러 주(州) 정부와 접촉해 투자 여건을 타진하고 있다. 이 중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인근 지역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수의 현대차그룹 관계자도 “검토 중인 사안이 맞다”고 밝혔다.투자가 성사되면 현대제철은 처음으로 해외에서 쇳물을 생산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르면 내년 봄 착공해 2029년께 제철소를 완공하겠다는 구상이다.

총투자비용은 70억달러(약 10조원)에 달한다. 연간 생산량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투자 액수를 고려하면 수백만t으로 예상된다. 조지아주 기아차 공장(연 35만 대 생산), 앨라배마주 현대차 공장(연 33만 대 생산)과 조지아주 서배너 지역에 완공 직전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 전기차 공장(연 30만~50만 대 생산 계획)을 감안하면 기본 수요는 탄탄하다. 현대제철은 지난해 1869만t을 생산했다. 미국에 추진하는 제철소는 고로 대신 직접환원제철(DR)을 통해 얻어낸 순수한 철을 전기로에 녹여 쇳물을 얻는 식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의 대규모 철강산업 투자 계획은 오는 20일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방향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량(연 268만t)은 물량 제한(쿼터제)에 묶여 있다. 인접한 멕시코 등에서 수입하는 물량도 트럼프 당선인의 관세 부과(25%) 위협에 노출돼 있다.

US스틸 사려다 한방 먹은 日…韓 현대제철은 美 직접투자 결정
10조원 들여 철강기지 추진…트럼프에 '깜짝 선물'

현대제철이 미국에 처음으로 쇳물을 생산하는 해외 제철소를 짓기로 결정한 것은 오는 20일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게 ‘깜짝 선물’이 될 전망이다.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 미국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할 수 있어서다. 일본제철이 ‘미국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US스틸을 인수하려다 노동조합 반대와 정치적 표 계산에 밀려 ‘불허’ 결정을 받은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의 ‘직접 투자’ 승부수가 받아들여지면 경제적으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상당한 파급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 첫 해외 ‘쇳물 생산’

7일 재계에 따르면 현대제철이 ‘쇳물 생산’을 해외에서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해외 투자를 할 때 부품사와 함께 진출했고, 현대제철은 현대차 공장 인근에 가공센터를 두는 수준이었다. 현대제철이 이번에는 미국 시장을 쇳물 단계부터 확실히 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현재 현대제철의 주된 쇳물 생산 방식은 고로와 전기로를 함께 운영하는 복합생산 방식이다. 미국 공장에서는 철광석에 일산화탄소 등 가스를 이용해 환원철을 만들어낸 뒤 이를 전기로에 넣어 쇳물을 만드는 방식이 유력하다. 이와 관련해 철강업계 관계자는 “고로 생산 방식은 탄소 배출이 많아 신규 허가를 받기 어렵고, 기존 고로 운영 회사들의 견제와 반발이 심해 외국 기업이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고 평가했다.
전기로만 운영하더라도 환원철과 순도 높은 고철을 함께 원료로 사용한다면 충분히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제철의 구상이다. 전기로는 고로에 비해 탄소 발생량이 적고, 쇳물 생산을 멈추기 어려운 고로와 달리 시황에 따라 운영을 일시 중단할 수 있어 탄력적 운용이 가능하다. 높은 전기료가 단점이지만 미국은 에너지 가격이 한국보다 낮은 데다 트럼프 당선인이 에너지 비용을 크게 떨어뜨리겠다고 약속했다.

현대제철의 제철소 운영은 1차적으로 그룹사 수요에 부응하는 목적이 크다. 다만 향후 미국 내 다른 완성차업체 등으로 판매처를 넓힐 가능성이 높다. 자동차 1대당 필요한 강판은 약 1t으로, 미국 내 현대차그룹 생산량(조지아주 서배너 메타플랜트 50만 대 합산 시)은 연 120만 대가량이다. 연 200만~300만t 생산을 목표로 제철소를 지을 경우 제너럴모터스(GM)나 포드 같은 다른 완성차 업체에 자동차용 강판을 판매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현대제철은 연 500만t 규모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해 이 중 17%를 현대차·기아 외 해외 완성차업체에 팔고 있다. 이 비중을 40%까지 높여 계열사 의존도를 낮추고 ‘차량용 강판 글로벌 톱3’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 트럼프 정책 ‘호응’

이 같은 현대차그룹의 구상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외치는 트럼프 당선인의 정책과도 궁합이 맞는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달 초 US스틸 매각에 대해 “완전히 반대한다”며 “세제 혜택과 관세로 미국 철강업을 다시 강하고 위대하게 만들 것이며, 그 일은 빨리 일어날 것”이라고 트루스소셜에 밝혔다. 양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세계를 호령했다가 지금은 존재감이 사라진 미국 철강업의 부흥을 위해서는 외부 투자가 필수적이다.

관세 문제에서도 미국 제철소 건설은 장점이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주장하는 대로 멕시코와 캐나다산 생산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세계를 상대로 10~20% 보편관세를 매길 경우 해외 생산은 저렴한 인건비 등에 따른 경쟁력이 상당 부분 사라진다.

미국산 철강 생산은 최종 완성차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중국 견제를 강화하면서 각종 보조금 수령 과정에서 원산지 규제를 갈수록 까다롭게 바꾸는 중이다. 현대차가 주력하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는 사실상 차체와 배터리가 가치사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쇳물부터 미국산’ 차량은 규제를 피하고 정책적 지원을 받는 데 유리할 수 있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미국 투자는 오래전부터 검토해온 사안으로 아직 결정된 바는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김형규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