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드 ‘하드에지’, 길리언 ‘드레이프’…미국적 추상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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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추상표현주의 대가 케네스 놀란드, 샘 길리언미술사의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는 1950년대다. ‘예술의 중심’ 유럽이 그 헤게모니를 미국에 내준 시기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하자 유럽의 예술가들은 희망을 찾아 신대륙으로 망명했다. 몬드리안, 뒤샹 같은 거장들이 자리 잡은 미국은 오랜 문화적 열등감을 걷어내고 현대미술의 메카가 된다. 유럽의 표현주의를 넘어 대상을 분할하고 해체해 점, 선, 면, 색으로만 남기는 ‘미국적인 회화’ 추상표현주의가 그 시발점이다.
오는 3월까지 서울 청담동 페이스갤러리 2부작 전시
마크 로스코나 ‘액션 페인팅’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처럼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한 거장들이 미국 추상회화의 전부는 아니다. 오는 10일부터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리는 두 개의 전시를 눈 여겨 봐야 하는 이유다. 1950년대 이후 미국에서 추상미술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란 점에서다. 전후 미국 회화의 흐름을 바꾼 혁신가로 꼽히는 케네스 놀란드(1924~2010)를 다룬 ‘Paintings 1966-2006’와 샘 길리언(1933~2022)을 조명하는 ‘The Flow of Color’다.놀란드는 미니멀리즘 대가 도널드 저드가 60년 전 “논쟁의 여지 없이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라 평가한 작가다. 30대 신예작가일 당시부터 일찌감치 최고란 평가를 받은 건 그의 배경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블랙마운틴칼리지 미대를 졸업한 놀란드는 이곳에서 독일 출신의 조형가 요제프 알버스를 만났다. 칸딘스키 등과 함께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로 기하추상의 선구자였던 알버스의 영향을 받아 선과 색에 대한 몰입으로 요약되는 독창적인 색면 회화의 초석을 다진 것이다.
면과 면이 예리하게 구분되면서 차갑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하드에지(Hard edge)’ 페인팅이 돋보이는 놀란드의 회화는 요즘 시각으로도 세련됐다는 인상을 줄 만큼 대담하다. 그의 작품은 직사각형 캔버스의 가운데에 표현하려는 대상을 그려 넣는 전통 회화의 문법을 배제했다. 전시장 1~2층에 걸린 10여점의 작품 중 상당수가 그렇다. 마름모꼴이 있는가 하면, 정사각형 캔버스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돌려놓거나, 불규칙한 7각형 등 독특한 변형 캔버스들이다. 회화를 담는 그릇을 넘어 캔버스가 선과 형태를 표현하는 확장된 개념으로 활용한 것이다.
선과 면의 뚜렷한 구분으로 강조되는 물질성 속에서 돋보이는 색채가 놀란드 작품의 포인트다. 1980년대 중반 제작된 ‘Chevron’ 연작이 그렇다. V자 형태 위에 색을 두껍게, 또는 얇게 겹쳐 발라 올려 생기는 섬세한 색감의 변화가 재밌다. 1980년대 캘리포니아 방문으로 영감을 얻은 ‘Flares’ 연작은 색채와 형태를 융합한 실험적인 작품이다. 반투명한 플렉시글라스를 활용한 이 작품은 선과 면을 평면을 넘어 입체적으로 구현한 조각적 회화다. 페이스갤러리 관계자는 “놀란드는 타계 전까지 색과 형태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확장했다”고 설명했다.전시장 3층으로 올라가면 샘 길리언의 작품 14점을 만나게 된다.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지만 길리언의 작품은 보다 자유롭다. 담금이나 얼룩, 붓질, 염색, 뿌리기 등을 통해 선과 선 사이를 오가며 서로 섞이면서도 개성을 드러내는 색감도 그렇지만, 형태적 측면에서도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전시에도 나온 드레이프(Drape) 회화가 대표적. 캔버스를 틀에 고정하지 않고 천장이나 벽에 매달린 작품은 ‘설치 회화’로 설명된다. 맴돌면서 눈에 담는 작품들은 한계를 맞닥뜨렸던 당대 회화의 형식적 돌파구였던 셈이다.
쉽게 접근할 만한 작품들은 아니지만, 미국 현대미술의 경향을 가늠하는 단초란 점에서 눈에 담을 만 한 이유는 충분하다. 케네스 놀란드의 작품 전반을 조명하는 전시는 1995년 서울 청담동 가나아트에서 개인전 이후 30년 만에 처음이다. 전시는 3월 29일까지로, 이후엔 일본 도쿄에 위치한 페이스갤러리 도쿄에서 4월까지 이어진다.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