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연봉 1억, 미국가면 11억…짐싸는 핵심두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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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퀘스천 대한민국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와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는 각각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만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두 기업인은 스탠퍼드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테슬라, 엔비디아처럼 수많은 미국 혁신 기업이 대학의 지원을 받으며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한다. 스탠퍼드대만 해도 연간 예산이 15조원에 달한다.
19세기 학교서, 20세기 사람들이, 21세기 학생 가르치는 나라
'창의력 괴짜' 배출 못하는 한국, 왜?
최근 서울의 한 주요 대학은 인공지능(AI)학과 교수를 해외 기업에 뺏겼다. 임용된 지 6개월 된 신임 교수였다. 주요 보직 교수들이 나서서 설득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학교에서 받는 연봉은 1억원 남짓. 기업이 제안한 금액은 80만달러(약 11억6032만원)였다. 대학 핵심 관계자는 “고급 인재를 교수로 뽑기도 힘들지만 이들을 붙들어 두는 것이 갈수록 더 어렵다”고 호소했다.지금 선진국들은 ‘혁신의 블랙홀’인 미국을 어떻게 따라잡을 것이냐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천인 계획’이었다. 각 분야에 걸쳐 전 세계 석학을 칭화대, 베이징대 등의 교수로 영입하는 플랜이다. 산학 협력에서 앞선 곳으로 평가받는 독일조차 대학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탁월대학 육성 전략’ 등 우수한 역량의 대학을 집중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검정교과서로 AI 시대 생존할 수 있나”
한국의 인재 양성과 관련해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등급을 가르는 데만 치중하는 대학 입시제도와 대학의 경쟁력 저하다.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사람들이 21세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KAIST 총장을 지낸 김도연 전 과학기술부 장관은 “선진국 중에서 학생을 등급별로 나누는 건 한국이 거의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서울대 총장을 지낸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는 “현행 입시제도의 근간인 수능의 표준점수화, 내신 9등급 상대평가 등은 미래 사회에 필요한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원칙은 제쳐두고 변별력과 객관성, 공정성을 최우선으로 둔 결과”라며 “이 같은 입시 제도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 교육은 새로운 지식, 기술, 아이디어를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창조형 인적자본이 아니라 기존 지식과 기술의 모방을 통해 축적한 모방형 인적자본에 머물러 있다”며 “챗GPT가 등장하면서 모방형 지식 노동은 무용지물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주요 7개국(G7) 중 한국처럼 정부가 표준으로 정한 검정교과서를 초·중·고 교육에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초대원장은 “AI산업을 이끌 인재를 검정교과서로 키울 수 있겠냐”며 “발상의 전환을 통해 ‘오픈소스’형 교과서를 만들어 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정교과서라는 폐쇄형 콘텐츠를 사용할 게 아니라 교과서를 제작할 때 외부의 다양한 콘텐츠를 반영할 수 있도록 설계를 다시 하자는 제안이다.
국가 교육 거버넌스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대학 총장은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위원회를 더욱 젊고 혁신적인 위원장을 임명하는 등 새롭게 꾸려야 한다”며 “위원회 설립 목적처럼 정권 교체, 정파적 의견에 따라 교육이 흔들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대학 입시 제도가 초·중등 교육을 좌우하는 것도 큰 문제다. 모든 교육이 대학 입학을 목표로 이뤄지다 보니 창의력 중심이 아니라 문제풀이식 교육이 12년간 이어진다. 김 교수는 “학생들은 할 수 없이 사회에 나오면 절반 이상은 쓸모없는 기존 지식을 반복하고 암기하느라 초·중·고 12년을 다 써 버린다”고 지적했다.
한국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인재들
필요한 인재를 기르지 못하는 데다 그나마 양성된 인재는 해외로 나가는 ‘두뇌 유출’ 현상도 심해지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지난 10년간(2013~2022년) 해외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은 9만6062명에 달했다. 인구 10만 명당 석·박사급 이상 핵심 인재의 미국 영주권 신청이 가장 많은 나라도 한국이다. 지난해 미국 정부가 석·박사와 C레벨 인재에게 발급하는 EB-1·2 취업비자 규모에서는 인도, 중국, 브라질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서울대 공대 학장의 겨울방학 기간 주요 업무는 미국 등에서 열리는 학회를 다니며 인재를 영입하는 것인데 갈수록 성공률이 떨어지고 있다. 한 서울대 공대 교수는 “가까스로 설득해 10명 중 한두 명 데려오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힘든 이유가 꼭 연봉 때문만은 아니다. 글로벌 기업에서의 경험, 이를 통한 창업 가능성 측면에서도 한국의 매력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는 매년 ‘MIT $100K 기업가정신 경진대회(Entrepreneurship Competition)’로 불리는 창업 경진대회를 연다. 우승상금은 10만달러에 달한다.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한 대학 교수는 “우승하면 상금을 받을 뿐 아니라 외부 투자가 몰린다”며 “대학 창업을 사회가 돕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탠퍼드대 총장을 지낸 마크 테시어 라빈은 최근 제넨테크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했다. 제넨테크는 AI를 활용한 질병 치료약 발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공로로 지난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베이커가 최근 10억달러의 벤처 자본을 유치해 창업한 회사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